[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나의 삶 나의 다이어리
책장 왼쪽 구석엔 매년 내 손을 지나친 열서너권의 다이어리들이 있다. 한해가 지날 때 쯤이면 손때가 묻어 겉장이 나들나들해진 참 남루한 노트이지만 그 안엔 지나간 소중한 시간들이 빽빽히 담겨져 있다. 처음엔 간단한 메모나 약속 스케줄을 기록했었다. 때로 주일설교를 메모하기도 하고 성경을 읽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필사하기도하고 기도문을 적기도 하였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어색한 시 한편을 적어놓기도 하였다.바람이 심히 부는 날에는 나뭇가지 울음이 애처로워, 눈이 펑펑내리는 들에선 눈사람이 되기도 하고, 새싹이 파릇파릇 자라는 뒷뜰에 앉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기도 하고, 빨갛게 물들은 단풍나무에 기대앉아 가을나무가 되어가는 나를 다이어리에 표현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다 커서 출가했지만, 내 옆엔 늘 아내가 함께 생활하기에 한밤중에 일어나 뭔가를 쓰고 있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내가 때론 야속 하기도 했다. 내겐 하루가 밝아오는 것도, 새들이 창가에 지저귀는 것도, 소나기가 페이브먼트에 퍼부어 이내 경쾌한 소리로 튀어오르는 모습도, 새벽 온 마을을 뒤덮은 폭설도 모두가 가슴 뛰는 풍경이었고, 내 안에 밀려드는 한편의 시 였고,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올해도 나는 다이어리 한권을 선물 받았다. 나보다 시간이 많은 아내에게 공개적으로 다이어리를 선물해달라고 12월이 시작되면서부터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아내는 3권의 다이어리 노트를 내게 내밀었다. 그 중 나는 아주 옅은 연보라빛 레더 겉표지에 은빛 별들이 판박이 된 다이어리를 선택했다. 그 표지엔 은박으로 "Shine like the whole universe is yours"라고 써 있었다. 나는 오늘까지 이곳에 4편의 시와 두편의 글을 적었다. 아마 올 한해가 지날 무렵 꽤 많은 시들이 이 다이어리에 적혀질 것이다.
작년 가을 한국방문 때 출판된 시집 "바람에 기대어"도 지난 다이어리 속에 틈틈이 적어둔 시들을 정리했었다.
나는 알고 있다.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를, 그리고 그 열심이 나를 채우려는 땅만 바라보는 허무한 것들이 아니기를 바란다. 영화 "야행성동물(Nocturnal Animal)"의 마지막 장면 ost "Table for two"는 쓸쓸하고 애잔하다.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전 내내 그 피아노의 선율이 귓전에 오래 머문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한 페이지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해본다. 올 한해도 작은 다이어리 한권에 나의 하루하루가 정직히 표현되기를 바란다. "Table for two"가 "Table for one"이 되어야 할 경우가 된다면 기꺼이 나의 삶을 따라 함께 발걸음을 옮길 다이어리를 품에 안을 것이다. (시카고 문인회장)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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