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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눈 내리는 날에

눈 내리는 날은 창가가 참 좋다. 이른 아침 눈비비고 앉은 내 자리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밖을 보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탐스러운 꽃송이가 되고, 나무로 만든 넓은 덱크의 경계는 사라진다. 완만한 곡선의 유연함이 꼭 하얀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다. 멀리 하늘을 향해 뻗은 파인츄리의 자태는 의연하다 못해 당당하기까지 위풍스럽다. 눈은 계속 내리는데 뒷뜰은 고요로 가득하다. 한동안 아무것도 깨어나지 않은 뒷뜰의 적막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휘르륵 다람쥐 꼬리가 흔들리더니 이내 두손으로 무언가를 움켜쥐고 입을 오물거리고 있는 다람쥐 한마리가 나무밑둥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곧이어 다람쥐는 무언가를 숨기려는지 눈덮인 땅을 파헤치고 이내 자취를 감춰버렸다. 얼마 후 그 자리에 두 세 마리의 새들이 와 앉았다. 나무 밑 가지 사이를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아마도 다람쥐 먹이 부스러기를 찾은 듯 했다. 이 작은 겨울새는 어디에서 날아온 것일까? 지난밤엔 어디에서 잠을 청했을까?

지난봄부터 꽃이 지고 낙엽이 다 떨어진 초겨울까지 분주했던 발자국들은 하얀 눈으로 덮혀지고, 뒷뜰에 남겨진 우리의 언어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우리의 생각과 걸음을 멈추게 하는 자연의 위대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길도 없는 곳에 길을 내며 얼마나 용감하고 씩씩하게 걷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던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한 건 계속 내리는 눈, 눈 때문이다.

이곳엔 높음도 낮음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다. 너의 잘남도 나의 부족도 없다. 우린 모두 하나같이 눈속에 덮혀질 뿐이다. 이토록 가벼운 새의 발자국마저 사라져 버리고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거인국의 난장이가 되어 위로 또 위로 시선을 높인다. 하늘창고를 열고 퍼부어 쏟아지는 한눈은 키재기에 익숙한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비행기를 타고 조금만 하늘을 날아 보면 우리는 안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는 곧 깨우치게 된다. 집들의 지붕이 고만고만한 것이며, 차들의 모양도 구분할 수 없으며 사람들의 모습은 한 점이다. 도시의 경계는 사라지고 가치의 기준도 모호하다. 높이 오를수록 우린 그저 풍경일 뿐임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우린 너무 큰 것에 몰두하고 살았다. 나는 늘 주연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 살았다. 서로의 관계에서 나는 늘 우위여야 했음을 당연시 했다. 계속 내리는 눈속에서 지금 우리는 풍경의 한 부분으로 서있다. 그리고 풍경의 요소들을 더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늦은 밤시간이었다. 서재에 앉아있는데 새소리가 조그많게 들리는 듯했다.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가까이 가보았다. 신기하게도 소리는 바깥문으로 향하는 복도 위 동그란 등 속에서 들려왔다. 나는 곳 이 상황을 알아차렸다. 공기가 빠지게 휀을 만들어놓은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와 알을 낳았고 이제 새들이 부화한 것이었다. 이 추운 겨울에 이곳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따뜻한 장소였고 다람쥐나 큰 새들의 표적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곳이었다. 나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울음소리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소리로 살아 있음을 감지할 수는 있다. 이 작은 새끼들이 자라 어느 봄 날 내 창가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줄 것을 의심치 않는다.

눈꽃을 매달고 있는 가지 끝을 자세히 보면 뾰족한 고깔모양의 잎눈을 쉽게 찿아볼 수 있다. 그곳엔 봄에 피어날 잎을 단단히 말아 놓은 곳이다. 찬찬히 그 잎눈의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동그란 꽃눈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동그랗고 작은 꽃몽오리를 감싸고 있는 앙증스런 꽃눈은 생각보다 많이 가지의 구석구석 맺혀져 있다. 우리의 눈이 이 작은 생명들에 머물다 보면 우리도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 보인다. 시간의 소중함, 생명의 소중함, 존재의 귀중함에 나를 돌아보게 한다.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신비한 생명의 탄생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답하게 된다. (시인, 화가)

눈은 계속 내리고 / 눈을 감아도 고개를 숙여도 / 땅끝까지 눈은 내리고 / 이미 나는 하예진 지 오래다 / 생각은 푹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 눈은 사물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 내가, 혹은 네가 소리치다 목 마른 / 거짓은 하얗게 지워지고 있다 / 고립된 섬처럼 눈은 쌓이고 / 거인나라에 난장이가 된 나 / 광활한 대지 위에 곧 없어질 / 발자국 하나 남긴다 / 눈은 계속 내리고 / 높고 낮음은 사라지고 있다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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