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꿈 속에서도 나는 꿈꾼다

용쓰며 이판사판 덤벼들지 않으면 매사가 물에 물 탄 듯 거기고 거기다. ‘용쓴다’는 ‘억지 힘’을 쓴다는 말이다. 제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용을 제일 많이 쓸 때는 해산 할 때나 변비로 고생하며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을 때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선 하늘이 뒤집히는 고통을 참아야 하고 꽉 막힌 곳을 뚫어야 할 때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요즘은 미친 것처럼 산다. 한달 내내 밤낮 안 가리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온전히 미치지 않으면, 눈이 뒤집히지 않으면 아무도 아무 것도 사랑할 수 없다. 생각하는 것 원하는 것들은 집요하게 추적해야 형태가 드러난다. 그동안 너무 허접하게 살았다. 보이는 것, 보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들의 허상을 찿아 해맸다. 나를 버리고 내 존재를 망각하고 인생의 본질을 포장하고 꾸미며 사는 날들은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나목처럼 아팠다. 곧 겨울이 다가 오리라. 앙상한 가지 사이로 모진 북풍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가리라.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올인 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허송세월 보내며 살아온 건 아니다. 변명의 여지는 충분하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고 보람 있는 일이라면 물 불 안 가리고 뛰어다녔다. 아이 셋 키우며 사업하고 칼럼 쓰며 밤잠 설쳤고 애들은 배우자 만나 손주 넷을 얻었다. 성공한 이민자의 모습 같은데 가슴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제 가을 문턱에서 펄럭이는 참 모습을 본다. 무슨 색으로 남은 인생을 채색할 것인가. 붉게 물들인 태양 아래 쪽빛으로 물들인 명주 한 필로 내 인생의 깃발을 펄럭일 수 있을까.

쓰러지는 때가 다시 일어나는 시간이다. 한 해 동안 숨죽여 살아왔다. 애들이 잠시 왔다 다녀가는 때를 빼면 시간은 이제 온전히 내 편이다. 서두르지 않고, 앞질러 갈 생각 말고, 잘난 척 드러내지 말고, 뒤쳐져도 불안해 하지도 말고, 소소하고 작은 일을 즐기고 고마워하고, 철학자도 아니면서 생을 성찰할 생각 말고, 그냥 다가오는 느낌에 충실하고, 사랑은 그냥 말없이 껴안는 것임을 실천하고, 오직 있는 그대로 보고, 보이는 것은 그대로 믿고, 생을 분석하지도 어렵게 해석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오직 나를 위해서만 남은 내 시간을 아껴 쓸 생각을 한다.

아무도 내 목에 방울을 달아 주지 않았다. 생의 방울은 스스로 단다. 방울소리 내며 존재의 당위성과 살아있음을 과시하지 않겠다. 죽어도 살고 살아도 죽어있는 무와 유의 경계에 조금씩 다가가면 사는 게 편안해 지지 않을까.

어제는 밤새 꿈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무엇을 그렸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꿈 속에서 시(詩)를 쓴 것 같기도 하다. 꿈은 갈망하는 자들에게 보이는 환상(Fantasia)이다. 새벽녁에 칼럼집 제목 생각에 용쓰다 잠이 깼다. 먹고 자고 생각하는 게 온통 그것 뿐이니 꿈도 현실도 엉망진창 뒤섞여 꿈꾸며 꿈처럼 산다. 눈이 온 천지를 덮었다. 사람의 발자욱 끊어진 동굴 속 원시인 같은 날이 편하다. 지구를 행복하게 할 의무도, 허장성세와 찬란한 색깔로 포장할 이유도, 목에 단 방울로 존재의 알람(Alarm)을 울릴 필요도 없는 조용한 아침, 꿈 속에서 떠오른 칼럼집 제목 ‘기억의 바다’가 생각난다. 전번에 떠오른 제목은 ‘비오는 날에는 렘브란트를’였다. ‘꿈은 꿈꾸는 자’의 것임을 믿고 칼럼집 출간 준비를 해야 하나.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