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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쌍둥이 아들을 생각하며

정만진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가작
peterjung49@naver.com
LNG Specialist

2018년 새해가 밝은지 벌써 10여 일이 지났다.
요즘 우리 부부는 생후 135일 된 손녀 민영이(Celine)와 "할마와 할빠" 제2막을 연출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며느리는 출산 휴가가 끝나 직장으로 복귀했기 때문에 낮에는 우리가 돌봐주고 있다. 작년 8월 말, 허리케인 하비가 몰고 온 50년 만의 폭우 속에서 태어난 손녀는 가족들에게 마음고생을 시킨 만큼 틀림없는 복덩이가 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옹알이도 하고 눈웃음도 친다. 자면서 배냇짓 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쌍둥이 아들과 만났던 벅찬 순간이 자꾸 떠오른다.
지난해 말 뉴스를 통해 서울의 모 대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던 미숙아 4명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한 달 가까이 인큐베이터 치료를 받았던 두 아들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아이들이 병원에 있는 동안 마음 고생을 해서인지 졸지에 소중한 자식을 잃고 절망에 빠져있을 그 가족들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마침 지난주가 38살 생일이었기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며 인큐베이터 속의 두 아들과 만나던 그때를 회상해 본다.

1980년 1월 3일, 새해를 맞아 처가에서 쉬고 있을 때 아내가 심한 산통을 호소했다. 날씨는 추웠지만, 출산 예정일이 2월인지라 안심하고 나섰던 나들이였다. 인근 병원도 있었지만, 초산이라 겁이 나서 정기검진을 받아온 한일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내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시간만 흘러가던 중 의사의 권유로 새벽에 제왕절개수술을 하게 되었다. 2분 간격으로 두 아들이 태어났다. 밖에서 허둥대며 애를 태우다 수술실에서 나오는 두 아들과 만났지만, 몇 시간이 흘러 아내가 마취에서 깨어난 후에야 아빠가 되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 달가량 일찍 태어난 아이들은 정상 체중에 미치지 못했다. 큰아이는 2.0kg, 작은 아이는 1.85kg 이어서 2.5kg이 될 때까지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매일 근무를 마치면 왕십리발전소에서 서울시청 옆에 있는 병원 신생아실에 들러 아이들을 보고 집으로 가곤 했다. 큰아들은 20여 일, 작은아들은 한 달 정도 지나서 퇴원하여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사고로 졸지에 소중한 자식을 잃고 절망에 빠져있을 가족들이 남의 일 같지 않고 매우 안타깝다. 다시는 재발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한다.
아이들은 인큐베이터에서 자라 그런지 유난히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쌍둥이의 특성상 한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곧이어 다른 아이에게 옮기 때문에 아내는 병원을 오가기 바빴다. 작은 아들이 심한 폐렴에 걸려서 위험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작은 텐트 속에 뉘어놓고 뿌연 안개비를 가습기로 뿌려대는 특별 치료법으로 살려낸 대림 성모병원 의사가 고맙다. 애들이 많이 울어서인지 아니면 선천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둘 다 소아 탈장으로 판명되어 어린 나이에 수술까지 받았다. 애들은 이란성 쌍둥이다. 갓 태어났을 때도 얼굴이 닮기는 했으나 똑같지는 않았고, 자라면서 보여주는 행동이나 발육 상태 등 여러 면에서 많이 달라 일란성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는 잠이 많은 사람이라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른다. 낮에는 부모님이 도와준다고 하지만, 밤에는 아내가 아이들을 돌보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밤에 보채는 애를 얼러 겨우 재우고 나면 또 다른 애가 보채서 뜬 눈으로 서서 지새울 때도 많았다. 번갈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참다못한 아내가 발로 나를 걷어차야만 일어날 정도였으니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다.
큰아들 이름은 해성이고, 작은아들은 해석이다. 돌림자가 바다 ‘해海’자여서 큰애에게는 바다와 같이 넓고 큰 뜻을 이루라는 바람으로 海成이라고 했고, 작은 애는 건강하게 자라서 큰 파도가 밀려와도 끄떡없는 바위처럼 건강하게 자라라는 뜻으로 海石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꼭 이름 덕분은 아니겠지만, 저체중으로 약하게 태어난 쌍둥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

쌍둥이에게 모유를 먹이고 싶은 내 욕심 때문에 아내가 고생을 했다. 그 후유증으로 인한 손 저림과 손가락 터널 증후군 때문에 외과 수술을 여러 차례 받은 것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마음 아프다. 아이들이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받던 한 달 동안, 아내는 처가에서 쉬지도 못하고 딱딱하게 뭉쳐서 아픈 모유를 짜내느라 받았을 스트레스와 양손 아픔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다 내 불찰이다. 모유는 한 아이에게만 먹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생각이 부족했다. 먼저 퇴원한 큰아들이 분유를 먹지 않고 모유를 찾는 바람에 모유를 먹이지 못한 작은 아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하다.
우리 부모님도 우리가 준영이와 민영이를 돌봐주는 것 이상으로 아이들과 놀아주고, 유모차에 태워 신길 5동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셨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외손주들을 끔찍이 예뻐해 주시며 돌봐주셨다. 지금처럼 동네마다 어린이 놀이터는 없었지만, 리어카에 싣고 다니는 말타기나 통통도 태워주셨다. 가끔 서울 대공원에 가면 놀이기구를 타는 것은 담력이 있었던 해석이가 해성이 보다 더 좋아했다.
가스공사가 1983년 8월에 설립된 후 평택인수기지 건설공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는 1982년 7월 영국에서 해외연수를 받으며 습득한 LNG 관련 기술을 활용해서 열정적으로 일했다. 우리 가족은 그해 10월, 아이들이 세 살 되던 해에 분가해서 평택 안중에 있는 사택으로 이사를 했다. 아내가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꾸미러 간다는 기쁨으로 라일락 꽃처럼 활짝 웃음을 머금었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985년 5월 본사로 이동할 때까지 2년 정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내는 직원 부인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1979년 4월 결혼 후 가진 모처럼 오붓한 시간이었다. 애들도 유치원에 다니면서 그림도 그리고 피아노도 배웠다. 사택 단지 내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고, 주변에는 논과 밭도 있는 곳이라 도시와는 풍경이 다르므로 농촌체험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그곳에서의 특별한 기억은 없는 듯했다. 나의 편협함으로 사춘기 갈등도 있었지만, 쌍둥이와의 아름다운 동행은 38년째 이어오고 있다. 남은 소망은 작은아들도 기회의 땅에서 형처럼 좋은 짝을 만나 일가를 이루고, 아들딸 낳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만진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가작
peterjung49@naver.com
LNG Speci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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