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사회적 거리 두기’ 하고 싶은 1 순위 (?)
‘크리스텐덤’(Christendom)은 오직 기독교가 세상의 중심에 서서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이른바 ‘오직 기독교 중심 세계’를 아우르는 말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고난과 핍박 시작은 수백 년 동안 기독교인들을 모진 역사의 뒤안길로 철저히 짓밟는 것처럼 보였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거치면서 역사적 반전이 일어났다. 기독교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매부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리키니우스와 합의하여 기독교를 정식으로 인정하게 된다(밀라노칙령, 313년).100년 전, 개화기를 전후로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던 백정, 노비, 여인들이었다. 이러한 가세가 양반과 지식층으로 확산되면서 명실공히 한국은 세계적인 기독교 국가로 기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잘못된 기세도 한몫해서 일간지 사회면에 화려한 조명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에 이단까지 가세해 (한국)기독교는 국민에게 가장 멀리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를 두고 싶은 1순위로 조사된 바 있다.
기독주의로 포장한 집단 이기주의
개인적 일탈을 꿈꾸며 기독교계에 심각한 이미지를 실추시킨 전광훈씨는 ‘뉴-크리스텐덤’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기독청’을 설립하여 ‘교황청’에 대항하겠다든가, 이미 ‘기독당’을 창당하여 현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의지만 봐도 알 만한 대목이다. 한국교회총연합회가 가까스로 사과문을 밝혔지만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은 쉽게 거두지는 않을 듯하다.
국가와 교회는 책임이다.
종교개혁에서 천명한 ‘교회론’은 하나님 나라의 신성한 사역에 합당해야 하며, 교회의 본분에 충실히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부 교회와 목회자의 해당 사항이라 하더라도) 교회가 조직적으로 정치세력화하고 실력행사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착각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우주적이고 주권적인 신앙을 정치적으로 조작하고 이용하는 순간 또 다른 독재자로 전락하게 될 소지는 다분하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다.'” (막10:45). “나는 낮은 자로 너희 중에 있나니”(눅22:27).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통치 방법은 섬김에 있다. 섬김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방법이다.
세력화-집단화, 또 하나의 우상
크리스텐덤을 꿈꾸는 기독교라면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앞세우며, 돈과 권력이 든든한 종교적 우상 집단으로 전락한다. 교회가 타락하는 것보다도 정치 집단화되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보여줄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발길에 이리저리 차이는 맛 잃은 소금 덩어리가 될 뿐이다.
교회의 정치적 발언은 언제나 평화와 정의를 위한 헌신밖에 없다. 기독교 내 진보든 보수든 세상과 같은 방법으로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국가를 만들 수 있다면 크리스텐덤은 해볼 만하다. 그랬다면 오병이어를 베풀고 난 후 예수님은 곧바로 벳세다 광야에서 출정식을 갖고 자신을 임금 삼고자 한 그들과 함께 로마를 전복시키고 말았을 것이다(못해서가 아니라 안 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되라는 교회의 사명을 저버리고 ‘세상 최고의 영향력’이라는 논리에 함몰되어, 오늘의 현대 교회가 ‘교회 속의 세상이 되지 않길 기도해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가 참된 성도들과 세우는 공동체는 좌파나 우파가 아니라 ‘참된 교회파’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을 향하여 빛을 발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줄 때다.
아무리 말세라 하지만, 국가가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국가와 국민을 핍박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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