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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사랑하고 살기도 부족한 날들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한 이후로, 사람들과의 교제는 줄었지만, 가족들과의 교제는 왕성해졌다. 일터가 문을 닫고 아이들은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기 때문에 가족들과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가족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늘고 전에 알지 못했던 생각과 보지 못했던 행동을 보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갖고 있다.

얼마전, 저녁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한잔 하며 식탁에 앉아 이런 저런 자료를 검색하고 있는데, 막내 녀석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날 따라 뭔가에 잔뜩 흥분해서 분주히 움직이며 가족들이 무엇을 하는지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엄마는 컴퓨터 책상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고, 누나들은 핸드폰을 하고 있었고, 아빠는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결국 만만한(?) 아빠를 찾아와 장난감 칼을 보여주며 한참을 설명했다. 자기 심심하니까 자기랑 놀아 달라는 얘기.

식탁에 앉아있는 아빠 무릎 위를 비집고 올라와 앉으며 아빠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피다가 식탁 위에 있던 커피를 옆으로 쏟았다. 식탁 의자와 카펫에 커피물이 진하게 들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쏟아진 커피잔을 보다가 아들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얼음이 된 것처럼 아이가 굳어 있었다. 잔뜩 긴장한 아이를 혼낼 수 없어서 “조심하지 그랬어. 다음부터는 조심하자.” 얘기를 했더니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서 있다가 쏟은 커피를 치우기 시작하자 조용히 자기 방으로 걸어 들어 갔다.

식탁을 치우는데 갑자기 속에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겨우 일곱 살인데, 일부러 그런것도 아닌데, 그동안 내가 너무 자주 혼을 냈구나.’ 잔뜩 긴장하고 가만히 서 있던 아이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아들에게 무척 미안했다. 이건 내가 바라던 아빠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었다. 엄격하신 아버지 밑에 자란 탓일까. 어느새 나에게도 그런 엄격한 모습이 배어 있었다. 실수도 웃으면서 넘기고 기분좋게 위로해 주면 좋으련만, 50을 앞둔 나의 모습은 어느새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나는 쉽게 화를 내는 편이다. 화를 내면서 실수도 많았고,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화를 다스릴 수 있을까?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1에서 10까지, 혹은 거꾸로 천천히 세어 본다거나, 100에서부터 거꾸로 3을 빼는 방법을 어렵지 않게 검색할 수 있었다. 잠시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면 마음이 진정되고 이성을 되찾기 때문이란다. 분노의 순간, 그 방법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먼저 화를 낸다는 것이 가장 큰 숙제이긴 하지만. 익숙해 질 때까지 많은 시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얼음이 되어버린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은 어떠실까 생각이 들었다. 나도 실수가 많은데, 불순종할 때도 많았는데, 주님은 한번도 나를 크게 혼내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주님은 그때마다 당황하거나 쓰러진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셨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먼저 용서받은 사람들이다. 지금도 여전히 죄와 실수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주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해 주신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기에.

최근 뉴스들을 보면서 느끼는 불편함이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생각과 정책까지, 한국과 미국을 넘어 온 세계가 양극화되어가는 듯하다. 정치는 좌파, 우파로 나뉘어 팽팽하게 맞서고 있고, 경제는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적 이슈들과 코로나 바이러스를 대응하는 모습도 이쪽과 저쪽이 완전히 나뉘어 있다. 도무지 중간이 보이지 않는다. 서로의 다름을, 다른 생각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니 협상의 실마리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골 3:13)고 서신을 보냈다. 특별히 ‘용납’이라는 단어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가 크다. ‘용납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 행동 또는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상대방의 말이나 생각,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를 한없이 용납하시고 받아 주시는데, 우리는 용납받은 만큼 이웃을 용납하고 있는가? 대화는 서로의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해야 계속 이어갈 수 있다. 말하기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잘 들어야 오해가 없고, 끝까지 들어야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된다. 중간에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기라도 하면 감정 싸움이 되기 쉽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이다. 내용이 그리 건전한 내용은 아니지만, 오늘의 시대적 상황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이 시대가 상대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다. 나는 괜찮지만, 너는 안된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해서 엄격해야 한다. 그러나 상대에 대해서는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가진 힘과 권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누군가 피해를 보지 않을까?’ 상대를 한번 더 생각하는 것이 배려하는 마음이다. 반대로 상대가 가진 권한과 능력으로 행하는 일을 인정해 주는 마음도 필요하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배려하고, 없는 자는 있는 자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양극의 간격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하나쯤은’, 혹은 ‘그러거나 말거나’라고 생각한다면 ‘노답’이다.)

양극화 시대, 양쪽 끝을 향해 허리에 끈을 묶어놓고 뒤도 안돌아보고 달려가기만 한다면 결국 끊어지든지 찢어지든지, 아니면 누가 쓰러지든지 할 뿐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 팬데믹 상황이라든지, 경제불황이라든지, 천재지변이라든지, 동시대를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회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한다면 모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자녀를 포함해서 상대방의 실수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다. 상대의 실수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능력”(고전 13:7)이 있다. 무조건적 용납은 자칫 죄를 키우는 것이 되겠지만,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실수와 죄에 대해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대화의 문을 열고 상대를 존중한다면, ‘오해’는 ‘이해’가 될 수 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날 때는 애굽에 임한 열가지 재앙을 생각해 보자. 십계명을 거꾸로 암송해 보자. 많은 실수와 다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막내 녀석이 쏟아버린 커피를 닦는 동안, 나 어릴 적 깨먹은 유리창이며 항아리들을 하나씩 둘씩 생각해냈다. 많이도 깼다. 그래도 막내는 내가 사용하는 커피잔을 깨지는 않았지 않은가? 잠자리에서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꼭 끌어 안아줬다. 다음 날 아침, 4년 전에 SNS에 올렸던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사진이 핸드폰에 떴다. 어제의 실수는 잊고 좋은 날만 기억하라. 내 핸드폰은 인공지능도 아닌데. 오늘 하루, 사랑하고 살기도 부족한 부족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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