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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의 소담 한 꼬집] 고구와 구마

백종원을 포함한 요리사들이 쓰는 단위 중 ‘꼬집’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날부턴가 그 낯설고 생경한 말이 마음 밭을 맴돌았다. 소금 한 꼬집, 후추 반 꼬집, 깨소금 두 꼬집, 자꾸 소리 내어 쓰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기 시작했다. 꼬집은 손가락으로 꼬집듯 식재료를 집어 올린 양을 말한다. 한 꼬집은 엄지와 검지로 꼬집듯 집어 올린 양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아니다. 그건 반 꼬집이고 엄지와 검지, 중지를 이용해 꼬집듯 잡은 양이 한 꼬집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사실 여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필자가 앞으로 풀어갈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담벼락에 ‘소담 한 꼬집’이란 간판을 걸어보았다. 꼬집은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다. 문학을 한다는 사람이 사전에도 없는 말을 굳이 차용한 이유는 한 꼬집이 주는 역할과 느낌이 좋아서이다. 소소하고 담담하고 대수롭지 않은 사적인 이야기에 뭔가 한 꼬집 넣어 간이 맞는 글을 쓰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한 꼬집이 사랑일지 감성일지 자책일지 칭찬일지 독설일지 아니면 희망일지 아직은 나 자신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내 언어의 꼬집들이 독자가 공감하게 될 신의 한 수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새로 추가하는 표준어에 언젠가는 꼬집이 등록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꼬집과 비슷한 말로 자밤이라는 말이 있으나 옛 소설에 등장했을 뿐 실생활에선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러나 날개가 나래, 냄새가 내음, 돌담이 흙담, 목물이 등물로 함께 쓸 수 있게 된 사례처럼 사람들이 편하게 사용하는 말이 표준어로 추가되곤 하니 주시하며 기다려볼 참이다.

음식을 하다 보면 더도 덜도 아닌 딱 소금 한 꼬집으로 간이 해결될 때가 있다. 물론 사람마다 손 크기가 다르니 양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손가락 끝으로 조금 집을 수도 있고 덥석 집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양을 아는 건 자기 자신이다. 오랜 경험은 필요한 양을 정확히 잡게 만든다. 노하우 역시 실패가 쌓여 축적된 결과치여서 마찬가지다. 망쳐보고 실패해봐야 얼만큼을 넣어야 할지 감이 오는 것이다. 음식도 글도 간이 맞아야 맛있다. 아무쪼록 내 언어의 꼬집들이 뭔가를 꼬집어 뜯는 게 아니라 한 꼬집 넣음으로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훈훈하고 어우러지게 잘 버무려주는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한 계절을 한국에서 보냈다. 가던 날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하루하루가 스펙터클했다. 작가에게 고통의 순간은 어느 날 좋은 글감이 되더라고, 그러니 좋게 생각하라고 누군가 위로했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벌써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으니 말이다.
박정이 선생님이 고구마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 주셨다. 인애 동생 생각하며 잘 길러주시겠다는 말씀도 적어주셨다. 피아노 위에 앉아있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는지 키도 훌쩍 컸고 잎이 무성한 게 건강해 보였다. 자줏빛 잎사귀는 어느새 녹색 옷을 갈아입었고, 갓 올라오는 새순들은 여전히 자줏빛이었다. 하트 모양 잎사귀들이 우린 잘 지내고 있다고 일제히 내게 손 하트를 날리는 것 같았다. 고구에게 기댄 구마도 편안해 보였다.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한 몸 같아 보였다. 합방시켜주길 잘했다. 함께 있으면 덜 외롭고, 서로 의지하면 쓰러질 이유도 없었을 텐데 왜 진즉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

고구와 구마는 아르누보 씨티(Art Nouveau City)에서 지낼 때 길렀던 고구마다. 그곳에 아르누보 양식의 덩굴식물 모양이나 반복적인 황금 꽃무늬는 없었지만, 욕실과 간이부엌, 큰 냉장고와 미니 세탁기, 복도에 비치된 수많은 도서와 뜨끈한 온돌, 그리고 로비에 24시간 편의점이 있어 척추 수술 후 나다닐 수 없었던 내겐 더없이 편했던 레지던셜 호텔이었다. 거기에 덩굴식물보다 멋진 잎을 뽐내던 그 녀석들과 균형을 잃은 채 절뚝거리던 내가 있었다.

어느 날 지인이 쪄먹으라고 보내 준 고구마가 남은 걸 잊고 있다가 마르고 싹이 난 뒤 발견했다. 실내가 더웠던 모양이다. 유리잔을 꺼내 물을 넣고 고구는 간신히 앉혔는데, 구마는 덩치가 작아서 잔 속으로 빠졌다. 페트병을 잘라 컵에 깔때기처럼 거꾸로 얹으니 딱 맞는 의자가 되어 구마를 앉힐 수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갈 사람이라 생필품 사는 게 아까웠다. 그러다 보니 ‘캐스트 어웨이’의 척 놀랜드처럼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재활용해 쓰는 데 달인이 되었다. 페트병으로 수저통 볼펜통 깔때기 등을 만들고 포장 음식 용기 재사용은 물론 마침내 딸기가 들었던 빨간 쟁반에 나물을 무치기까지 이르렀다. 다 살게 마련이었다.

식물 기르는 덴 젬병이라 햇볕 잘 드는 창틀에 고구마 컵을 올려 두고 물만 갈아 주었을 뿐인데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고구는 성장이 빨랐다. 하루가 다르게 흰 뿌리를 내려 컵을 채웠고 튼실한 가지를 세우며 하트 모양의 잎사귀를 하나둘 피워냈다. 고구와 구마라는 이름은 포테와 이토라는 고구마를 기르는 내 글 벗이 지어주었다. 뭔 이름을 그렇게 성의 없게 지었냐고 구박했는데, 자꾸 부르니 촌스러운 이름에 정이 갔다.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았다. 고구는 크고 늠름했고 구마는 작고 여렸다. 자라는 속도도 확연히 달랐다. 난 더디 자라는 구마가 늘 안쓰러웠다. 이름을 바꿔 주었다면 둘째의 설음을 면했을까? 고구와 구마는 내가 웃는 것보다 우는 걸 더 많이 보고 자랐다.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뿐이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내 마음이 아팠던 것처럼 고구마들도 나를 보며 안쓰러워했을 것이다. 우리는 아르누보 16층 창가에 서서 상록회관 동편으로 뜨는 해와 강남 롯데 타워 위로 떠 오르는 달을 보았다. 어떤 날은 창을 타고 흐르는 겨울비의 눈물을 보았고 또 어떤 날은 함박눈이 내리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진풍경을 보며 그렇게 찬 겨울을 버텼다.

출국 날짜가 정해지자 고구와 구마가 걱정되었다. 누구에게 맡기면 잘 길러줄까 여러 얼굴을 떠올렸지만, 마음 편히 믿고 맡길 곳이 없었다. 내가 방을 비우고 나면 객실을 청소하는 분이 당장 버리겠구나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생명이 있는 것을 키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생각난 게 박정이 선생님이었다. 그분이 운영하는 카페 포엠에 초록 화분이 많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그분을 몇 번 뵙진 않았지만,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다. 그분이라면 잘 길러 주실 것 같았다. 유리잔은 호텔 거라 돌려줘야 해서 수저통으로 썼던 페트병에 물을 넣고 고구와 구마를 함께 넣었다. “이제 엄마는 가야 하니까 둘이 손 꼭 붙잡고 있어야 해.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는데 슬픔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행여 추운데 얼어 죽을까 봐 쓰레기 봉지에 겹으로 싸서 여민 후 부탁 편지를 앞에 써 붙였다. 공항 라이드를 위해 온 동생에게 카페 앞에 잠깐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문 앞에 고구와 구마를 내려놓고 떠나려는데 자꾸 속울음이 삼켜졌다. 남동생이 물었다. 캄캄한 새벽에 왜 남의 가게 앞에다 쓰레기를 두고 오냐고. 자초지종을 들은 동생이 한마디 했다. “와! 씨바, 좃나 감동스럽다.” 분명히 욕인데 동생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고구와 구마는 완전체인 고구마로 다시 태어났다. 병들어 죽은 줄 알았던 몸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만 있으면 괜찮아진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던 기특한 녀석들. 좁고 캄캄한 방에 자신을 가둔 채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못된 소리를 지껄이던 내게 상처가 아물면 새살이 돋는다는 걸 깨닫게 해 준 고구마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박인애 프로필

nadainae@naver.com

『문예사조』 시 부문 신인상, 『에세이문예』 수필 부문 신인상, 『서울문학인』 소설 부문 신인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미주한국문인협회 부회장, 한국본격수필가협회 미주지회장, 달라스한인문학회 회장 역임.
중앙일보 문화센터 한국문학 강사.
세계시문학상, 해외한국문학상 외 수상.
에세이집 『수다와 입바르다』 『인애, 마법의 꽃을 만나다』
시집 『바람을 물들이다 』 『말을 말을 삼키고 말은 말을 그리고』
전자시집 『생을 깁다』 6·25 전쟁수기집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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