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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과 죽염을 먹으며 암을 이겨내다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1/01/03 09:39

정명희 | 폐암.

월드컵 축구 경기로 뜨거웠던 2002년 1월, 고열과 호흡곤란으로 원대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폐렴으로 진단되어 치료받고 퇴원했지만 3월경 다시 고열과 호흡곤란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같은 폐렴이라고 해서 마찬가지로 치료받고 퇴원했다. 그런데 6월, 똑같은 증상으로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도 같은 증상으로 계속 입원하는 나를 보고 정밀검사를 하자고 하였다. CT를 찍고 나서 보호자를 부르더니 CT에 이상 소견이 보인다고, 종양일 가능성이 있으니 좀 더 검사해 보자고 했다. 남편은 당시 의사에게 환자인 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입원 2주쯤, 담당 교수님이 기관지 내시경을 해서 조직을 떼어 검사하자고 하셨다. 다시 3주가 지나 결과를 갖고 교수님이 오셔서는 “정명희씨. 종양으로 나왔어요. 다행히 빨리 발견되어 수술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수술합시다. 아셨죠?”라고 하셨다. 난 이 소리를 듣고도 암이라 생각지 못하고 그저 종기라고만 듣고 아주 태연하게 당연히 수술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생각하라며 다독이고 나가는 교수님은 나가셨다. 남편도 전화해서는 수술하면 괜찮다고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종기 하나 떼어내는 줄 알고 편히 쉬고 있는데 수술을 담당할 교수님이 수술 확인을 하고는 너무 표정이 밝은 내게 물으셨다. “혹시 환자분 병명이 뭔지 알고 계세요?” 나는 그저 폐렴이라고 아는 대로 대답했다. 교수님은 주치의에게 환자에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주치의는 환자에게 분명히 종양이라고 말했노라고 대답했다. 듣고 있던 교수님이 “정명희 환자분. ‘암’이예요. 암. 내일 첫 번째로 수술할 겁니다. 지금부터 금식하세요.”하고는 나가셨다. 병실의 눈길은 모두 내게 쏠려 있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간호사실로 가서 주치의 선생님 좀 불러달라고 엉엉 울면서 매달렸다. “선생님이 언제 저보고 암이라고 하셨어요? 종양이라고 하셨잖아요.” 난 종양이 암인 줄 알면서도 종양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암으로 듣지 않고 종기로만 들었다. 아니, 정말 종기로 들렸었다. 암이라니. 기가 막혔다. 가슴이 무너지고 너무도 억울했다. 남편에게 전화해서는 “여보. 나 암이래. 그럼 나 죽는 거야? 어떻게 해? 나 어떻게 해?”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남편은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건만 말을 했다며 몹시 화를 내며 욕을 퍼붓다가는 병원으로 바로 왔다. 괜찮다고,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위로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친정 엄마가 소식을 듣고는 달려오셨다. 엄마는 군산에 있는 폐암 환자를 찾아가 보자고 했다. 아버지 때문에 인연이 있는 민속한의원에서 소개한 분으로 폐암 말기 3개월 선고를 받고는 10년째 건강하게 살고 계시다고 하셨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환자복을 입은 채로 차를 타고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너무 건강하고 정정한 할아버지는 늙은이인 나보다 젊으니까 더 빨리 나을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사실, 민속한의원과의 인연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 전주예수병원에서 간암 말기 3개월을 선고받고 그대로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살려보겠다며 간에 좋다는 것들을 구해오고 이곳저곳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택시를 타게 되어 기사님께 간암 환자가 무얼 먹어야 좋을지 아시냐고, 혹시 무엇 먹고 좋아졌다는 암환자를 아시냐고 물었더니 민속한의원을 소개해줬다고 한다. 엄마는 그 길로 민속한의원에 가 치료약을 받아오고 더불어 죽염, 마늘을 아버지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열심히 정성껏 약과 죽염과 마늘을 드셨다. 그러기를 일 년이 지나 병원을 찾아 초음파, CT 등 여러 검사를 했는데 누가 암환자라고 믿겠느냐고 하며 의사 선생님도 놀라셨다고 한다. 아주 건강한 간이라고 하시면서. 아버지는 5년을 더 사셨다. 건강관리만 잘하셨어도 아마 지금도 살아 계셨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 이후 게으름을 피우시고 건강한 사람도 평생 먹으면 좋을 마늘도 드시지 않고 엄마 몰래 다시 술과 담배를 손에 대기 시작했다. 얼마 못 가 이번에는 간, 위까지 재발하여 두 달 만에 돌아가셨다.

그런 엄마는 이번에는 딸이 폐암이라는 날벼락을 맞았는데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수술 전날, 수술을 거부하고 각서를 쓰고 밤 10시에 가퇴원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 딸아이와 누웠는데 온갖 상념과 함께 눈물만 나왔다. 31살에 남편을 만나 낳은 딸이 이제 28개월인데 이 어린것을 두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민속한의원으로 가서 입원하고 짐을 풀었다. 암의 속성을 잘 알면 무섭고 두려운 존재만은 아니다. 단시일에 분노와 적개심으로 무리하게 공격적으로 승부하려 들면 안 된다. 원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아버지 때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쉽게 이해가 됐다. 내 몸에 찾아온 암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리라 결심했다. 암이 내 생명을 앗아갈 잔인하고 무서운 존재라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남편은 힘을 내라고 건강해질 수 있다고 했고 혼자 남은 나는 낯선 병실에서 외롭고 무서웠다. 그렇게 나의 투병은 시작됐다. 아침이면 맑고 상쾌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항암약차와 죽염을 손에 들고 산책을 했다. 서로 아픈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니 같이 위로하고 위안이 되었다. 보호자들은 환자를 먹여 보려고 온갖 좋은 것들을 구해 다리고, 삶고, 택배를 보내 먹이는데 보기만 하는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먹고 싶은데, 여기서 주는 약 말고도 다른 좋다는 것들도 먹고 싶었다. 엄마와 남편은 이것저것 먹어봐야 소용없다며 몸에서 소화도 안 되고 돈만 버린다고 하셨다. 그런 냉정한 말에 섭섭하고 서운하고 미웠다. 나 죽기를 바라나. 내가 먹겠다는데도 단 한 번도 좋은 거라고 구해왔으니 먹어보라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먹기 싫다는데도 어디서 구해오는지 온갖 것들을 가져와서는 환자 비위를 맞춰가며 먹이려 애쓰는데…. 정말 부럽기 짝이 없었다.
사실, 경제적으로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힘든 가정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더 열심히 입원 생활을 했다. 남보다 더 열심히 쑥뜸도 뜨고, 마늘도 먹고, 산책도 하며 지냈다. 그중에 상황이 더 악화되는 사람도 있었고, 퇴원해서 병원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저 더 열심히 약 먹고 쑥뜸 뜨고 죽염 먹고 마늘 먹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형편이 어려워서 입원은 한 달만 가능했다. 퇴원을 하려니 환자들이 내가 다 나아서 나가는 줄 알고 부러워했다. 돈이 없어서 나가는 건데…. 집으로 돌아오니 좋으면서도 혼자 투병할 생각에 불안했다. 남편의 독려로 명상을 위해 국선도를 다니고, 죽염은 혀가 갈라져서 음식 맛을 모를 정도로 먹었다. 마늘은 많이 먹는 날은 하루에 최대 45통까지 먹은 기억이 있다. 트림하고 가스가 나오면 마늘 냄새가 날 정도였다.

그렇게 5개월이 지났을까. 내 몸속의 암이 없어졌을까, 그대로일까, 커졌을까 궁금했다. 남편과 상의해서 방사선과를 찾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원장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엑스레이를 찍고 CT를 찍었다. 이전 병원에서 찍은 CT와 비교해보니 전에 보였던 암의 자리가 사라졌다. 암이 보이지 않고 일반 폐처럼 깨끗하다며 원장님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기뻐서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제일 먼저 민속한의원 원장님께 전화해서 소식을 알리니 기뻐하는 대신 염려를 하셨다. 암이 없어진 게 아니다. 안 보일 뿐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방심해서 재발하는 경우를 자주 보셨다며 신신당부하셨다. 명심, 또 명심하여 나는 변함없이, 아니 더 열심히 뜸을 뜨고 명상을 하고 채소를 길러 먹고 마늘을 먹었다. 그리고 2004년 1월, 딸을 낳았다.

건강하게 지내던 그해 7월, 악몽 같던 고열과 호흡곤란이 찾아와 원대 응급실을 향했다. 겁이 덜컥 났다. 재발했을까? 사진을 찍어보니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 수술을 하지 않았다다니 죽으려고 그러냐는 말을 뒤로 한 채 다시 각서를 쓰고 응급실을 나와 전북대 병원으로 갔다. 역시 폐렴이라고 했다. 남편이 사실 폐암 환자라고 말하고 나자 폐렴 치료는 뒷전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검사를 시작했다. 결과는 깨끗했다. 집으로 돌아와 폐렴 치료를 하고 퇴원해서 다시 예전처럼 열심히 마늘 먹고, 죽염을 먹었다. 어린 두 딸을 키우려면 난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같은 암환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무엇보다 나약한 자신을 먼저 다독여야 한다. 흔들림 없는 의지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다시 또 일으켜 세워야 한다. 암환자에게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움과 절망이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도 많다. 그때마다 나를 지켜보며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리지 못하고 가슴 아파하는 가족을 생각해야 한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시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으면 언제나 희망은 우리 곁에 있어준다고 말하고 싶다.

엄마, 우리 남편.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딸들. 아플 때에 낳았던 둘째가 벌써 5살이 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자라서 너무 행복합니다. 지금도 저는 건강을 챙기며 늘 운동하고 마늘과 죽염을 먹으며 건강하게 잘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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