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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날씨의 맛

요즘같이 습하고 뜨거운 날에는 시원한 수박 화채 한 그릇이 생각난다. 더운 날과 수박 화채는 한 쌍이다. 나에게 여름은 수박 화채 같이 시원 달달한 계절인데, 누군가 에게는 다를 수도 있다. 한 친구는 무더운 여름에 결혼식을 치르느라 바짝 조인 드레스 허리춤이 흠뻑 젖도록 땀을 줄줄 흘렸던 굴욕적인 순간을 떠올린다. 수박 화채로 여름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쾌한 기억 때문에 여름이 싫어진 사람도 있다. 프랑스 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날씨만큼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없다.”고 했다. 날씨를 느끼는 감각과 감정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날씨만큼 사람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있을까. 날씨가 맑아서 기분도 화창하다, 눈이 폴폴 내리니 괜스레 설렌다는 표현은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이야기다. 비 오는 날 폭발하는 감수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날씨와 인간의 상관관계는 인류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날씨의 맛’(사진)은 감각과 감수성을 오랜 시간 연구한 알랭 코르뱅을 비롯한 10명의 저자가 함께 쓴 책이다. 지리학, 기상학, 사회학 등 서로 다른 분야 작가가 만나 날씨라는 공통 주제를 놓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서술한 내용이다. 가장 큰 매력은 날씨와 관련된 감각과 감정의 변천사를 세밀하게 묘사한 점이다.

햇빛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최근 200년 사이에 완전히 바뀐 사실을 아는가. 18세기까지도 햇볕을 지나치게 쬐면 몸에 해롭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가뭄과 무더위 같은 재난은 태양에서 비롯됐다고 여겨 증오와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병을 고치기 위해 햇볕을 쬐는 것이 권고되기 시작하면서 태양의 살균효과 같은 긍정적인 면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햇볕을 쬐었을 때 생성되는 비타민D가 면역력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일광욕 열풍을 가져오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햇빛은 생명력, 욕망, 건강의 상징이 되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는 뇌우, 폭풍우, 태풍은 ‘신의 분노 표출’로 여겨져 오랫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독일 낭만주의의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운동’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뇌우와 폭풍우는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미학의 대상으로 바뀐다.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사회적 격변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폭풍우가 등장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기상이변’도 세월이 지나면 지극히 당연한 자연현상으로 기록될지 모를 일이다. 우리가 휴가를 위해 숙소나 기차표를 일찍부터 예약하도록 부추기는 것, 하늘의 색깔과 계절 고유의 돌발 사고를 예측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 시대가 낳은 또 다른 부산물이다. 날씨는 사람의 감정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재해보험은 물론 산업 전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격에 맞춰진 계절을 기다리며, 언제나 태양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를 바라고, 계절과 달력이 정해진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욕심이다.

기상청이 예보의 정확도를 높이겠다며 슈퍼컴퓨터를 도입했지만, 오보는 여전하다. 그럴 때마다 기상청을 욕하면서 날씨를 상대로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할 것처럼 날씨 탓을 한다. 그렇다면 기술이 발달하면 원치 않는 변수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피해 규모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오는 태풍을 못 오게 하거나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을 못 나오게 틀어막을 방법은 없다. 자연재해를 대비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오만이다.

날씨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에게 악감정을 갖고 태풍을 불어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날씨는 언제나처럼 큰 틀의 섭리에 따라 움직였을 뿐. 갑자기 쏟아지는 비바람에 젖을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염려된다면 날아갈 만한 물건들을 치워두고 가방 속에 우산을 챙기면 된다. 애먼 날씨 그만 잡고 이제 그만 날씨를 맛보기를 권하고 싶다. 풀벌레 우는 습한 여름밤의 운치가 있지 않은가.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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