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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 상상바다 속 ‘고래’를 만나다

1989년, 미국에서 ‘백 투 더 퓨처 2’(Back to the Future, Part II)가 개봉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미래 이야기를 비웃었다. 영화 속 2015년의 모습에는 납작한 평면TV, 가상현실 헤드셋 기기, 지문인식 결제시스템이 등장한다. 아득한 미래도시로 보이던 영화 장면이 어느새 우리 현실이 된 지 오래다. 게다가 공중을 떠다니는 스케이트보드, 자동으로 신발 끈을 조절하는 파워레이스 운동화는 이미 몇 년 전 출시됐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말도 안 돼!”라고 치부했던 과거가 부끄러울 정도다.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다.

어디 SF 공상과학 영화만 그럴까? 소설 역시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꾸며낸 가짜 이야기라는 큰 맥락은 같다. 진짜가 아닌 줄 알면서도 주인공이 위험에 처하면 내 심장이 벌렁거리고, 주인공이 누명을 뒤집어쓰면 내 손이 부들거린다. 말도 안 되는 허무한 판타지일수록 홀리기 쉽다. 그런데 여기 홀린 줄도 모르고 빠져들게끔 독자를 현혹하는 소설이 있다. 천명관 작가의 <고래> (사진) 이다.

이야기 얼개만 대충 설명하자면, 소설은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여자들 이야기다. 주인공들의 삶은 유난히 치열하다. 살아간다는 표현보다 이겨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들의 부침이 유난히 가슴 아픈 이유다. 금복은 우연히 만난 생선 장수를 따라 이끌리듯 바닷가로 향한다. 그곳에서 큰 고래를 만난 이후, 손대는 사업마다 크게 성공한다. 그의 딸 춘희는 타고난 강골이어서 코끼리에 밟혀도 끄떡없다.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폐허가 된 벽돌공장으로 돌아와 벽돌 빚는 일을 계속한다. 여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여장부의 이야기인가 싶을 때쯤, 흉측한 모습을 한 노파가 등장, 주인공을 파국으로 이끈다는 설정이다. 그녀들의 이 모든 이야기가 한 편의 복수극이었다.

천명관 작가는 각각의 이야기들을 소설 전반에 흩뿌려놓았다. 맨몸으로 시작해 거대 사업가가 된 금복의 성장기가 한창일 때 벽돌공장 장인정신을 이어가는 춘희 이야기로 껑충 뛴다. 이 조각들을 하나로 꿰는 힘은 뭐니 뭐니 해도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익숙함일 것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세계명작동화전집’처럼 말이다.



소설은 여러 시대를 살다 간 인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현재를 사는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눈으로 보거나 직접 겪지 않았을 뿐, 금복과 춘희가 사실은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코끼리에 밟혀도 멀쩡한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다.

 가끔 해외토픽에 소개되는 세계의 기이한 화제도 있지 않은가. 영화 ‘백 투 더 퓨처’가 30년 후 기술 실현을 이뤘듯이 금복 모녀의 이야기 역시 훗날 누군가에 의해 기록이 발견될지 모를 일이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본시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고래> 를 읽고 저마다 다른 감상을 머릿속에 저장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세 여자 인생을 기억할 것이고, 누군가는 금복의 손에 죽어간 철 가면, 청산가리 같은 다른 인물을 기억할 것이다. 누구를 어떻게 기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이라는 거대 바닷속에서 이 등장인물들과 함께 신나게 헤엄쳤다면 그걸로 그만이다.

이 소설에는 특이하게 화자가 등장한다. 무성영화 시절 영화를 해설하던 참견꾼 변사의 역할이다. 지나치게 허무맹랑해서 실소가 터져 나올 때쯤 등장해 “이것은 뻥이다”고 속 시원히 외치며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같이 한번 지켜보자고 독자들을 끌고 간다. 그래서인지 그럴싸한 이야기로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게 하는 소설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소설이 꼭 현실적 공감을 끌어낼 필요는 없다. 도떼기시장 야바위꾼이 늘어놓는 잡설을 듣고 까르르 웃는 것처럼 소설을 읽고 그 순간 즐거웠다면 그것으로 제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닐까.

이소영/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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