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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미주 한인교회의 역사(8)

김상복 목사가 목회의 촛점을 성과중심보다는 사람중심에 둔 목회철학은 벧엘문화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활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중심의 목회에서 교인과관계에 늘 마음을 두었다. 교인들 사이의 관계가 흩으러지면 담임목사의 목회 자체에 어려움을 초래 할 뿐 아니라 교회 전체가 흔들린다는 진리를 잘 터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늘 ‘실수하고 안심하는 교회’가 되자고 시간이 있을 때 마다 강조했다. 교인들이 실수할 때 그 실수를 지적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고 서로 용납하고 안아주는 영적인 성숙을 말한다. 이는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는 죄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자숙하자는 의미이지 실수를 권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김목사는 교인의 잘못을 다룰 때 권징보다는 권면을 택했다. 교회 초기에 어려움이 생겼다. 벧엘교회에서 장로로 안수받은 한 장로가 부부생활의 문제로 외도를 하고있는 사실이 교회 안에 널리 퍼졌다. 당회는 교회 규약 7조 7항에 규정하고있는 권징권을 발휘할지 여부를 놓고 고심했다. 김목사는 권징보다는 당사자를 만나 조용히 권면하는 쪽을 택했다. 김목사는 권면을 통해서 이 문제를 당사자가 해결점을 찾도록 상담하여 원만하게 해결했다.



김목사에게는 좀 답답한 점도 없지 않다. 당회나 제직회 중에 어떤 안건을 놓고 두 가지 의견으로 갈려 사회자의 의견을 물으면 “좀 더 생각해 보지요”라고 말하면서 대부분의 경우 즉답을 회피했다. 그는 어떤 의견이 더 좋고 덜 좋음보다는 공감대가 형성 될 때까지 기다리는 쪽을 택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만나 어떤 교회적인 현안 또는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 질문을 하면 “장로님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반문을 하면서 답변을 주는 대신 대화중에 공감대를 찾으려 애를 썼다.

그는 질문을 가지고 온 사람이 이미 자신의 회답도 갖고있다는 전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화중에 상대편의 인격을 최대한으로 존중하는 쪽을 늘 택했다. 그래서 대화가 끝난 후 시원한 해결점을 찾지 못할 때도 있었으나 상호간의 인격적인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는 결과를 체득하게 됐다. 그는 교인들을 대할 때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이 더 중요하다는 성경적인 원리를 버리지 않았다.

1980년 봄 어느날 김목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심방을 같이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학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내는데 융통성이 있었다. 당시에는 부목사가 없었기 때문에 김목사 자신이 동분서주했다. 김목사는 대학 강의를 취소하고 나와 함께 글랜버니에 있는 한 교인댁을 찾았다. 30대 중반의 젊은 여인이 3살짜리 딸을 안고 울고 있었다. 노스 에베뉴 선상에서 케리와웃을 하는 남편이 오늘 새벽 2시에 강도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그 여인은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내 남편을 이렇게 데려가십니까? 내 남편이 무슨 죄를 젔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김목사는 여인의 울부짖음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은 채 여인의 손을 잡고 조용히 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난 후 김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왜 남편을 이렇게 데려가셨는지는 저도 몰라요.”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는 “목사님, 왜 그렇게 말하셨어요?” 라고 물었다. 김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슬픔을 당한 분에게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같이 슬퍼하고 울어주는 것 이외에는…”

손인식 목사가 부목사로 부임한 후에는 심방을 김목사와 서로 나누어서 했기 때문에 좀 여유가 있었다. 불도저인 손목사는 심방을 요청하면 제빨리 응답하는 기질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김숙자 권사를 대동하고 심방을 했다. 어느 겨울 늦은 저녁에 교회 출석을 한 두달 쯤 한 여자 새교인이 긴급한 일이있으니 심방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손목사가 달려가 보니 젊은 여자가 혼자 살고 있었다.
손목사는 그 길로 김숙자 권사집으로 달려가 김권사와 함께 그 여인집으로 다시 찾아가 심방을 마쳤다. 손목사는 그날 너무 긴급하다보니 김권사와 동행하는 것을 잊고 만 것이다. “여자 심방은 여자와 함께 같이 가야합니다.” 손목사가 후에 들여준 그의 심방원칙이었다.

김목사는 한달에 한번 외부 집회를 나갔다. 이는 김목사의 청빙조건에 따른 것이다. 첫 5년간은 이 조건이 잘 이행되었지만 1988년 새 건물로 이전을 한 후 부터는 목회 일이 바빠지는 바람에 잘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한번은 김준성 장로 둘째 아들 아홉살짜리 다니엘이 집 근처에서 친구함께 자전거를 타다가 마약을 한 한 젊은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치어 두 아이가 함께 목숨을 잃은 사고가 났다. 다니엘은 엠블런스에 실려 존스 합킨스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다니엘은 의식을 잃은 채 산소호흡기를 통해 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 마침 김목사는 뉴욕지역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나는 김목사에게 전화를 하여 다니엘에게 일어난 사고를 전했다. 김목사는 그날 저녁 집회를 취소하고 병원으로 달려와서 교인들과 함께 기도를 했다. 다니엘은 그날 저녁 하늘나라로 갔다. 김목사는 뉴욕으로 다사 돌아가 나머지 집회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다니엘의 장례를 집전했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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