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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한인이민교회의 역사(12)

미국의 배심원제도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영미사법제도의 특징으로 국민이 직접 재판에 참여하여 법관이 재판을 독점하여 법적용에 있어서 지나친 편견과 오류를 범하는 경우를 막고, 사회적인 정의와 공동체의 윤리기준을 반영하지는 뜻에서 세워진 이를테면 ‘법관의 횡포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이다.

그러나 미국배심원제도의 역사를 보면 많은 흑인과 유대인들이 백인 배심원들의 편견적인 평결에 의해 불의한 언도를 받은 예가 허다하다. 반대로 흑인 배심원들의 편견적인 평결로 인해 백인이 억울함을 당한 경우도 있다.
그 예가 1995년 풋볼선수 O.J.심슨의 살인혐의사건에 대한 배심원 평결이었다. 심슨은 1994년 자신의 전처와 전처의 친구를 살인한 혐의로 배심원재판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으면서 미국내 여론을 흑백으로 완전히 갈라놨다. 결정적인 물증까지 있어서 유죄가 확실시 될 것으로 내다봤던 이 재판은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흑인 8명, 백인 2명, 기타인종 2명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만장일치 유죄평결에 실패했다.

벧엘교회는 1988년 1월 23일 현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교구제도를 확장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하워드카운티에 집중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티모니움 타우슨 등 북부와 글랜버니 등 남부에 모여살았다. 따라서 북부와 남부에는 5개 교구가 있었으나 하원드카운티에는 엘리콧시티교구와 콜럼비아 교구 등 2교구뿐이었다. 엘리콧시티 1교구는 김창제 장로가, 나는 엘리콧시티 2교구를 맡아 교구장으로 섬겼다.

어느날 한 교구에 살고있는 이승식 집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큰 아들 J군이 대낮에 권총강도가 쏜 총탄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는 믿지 못할 소식이었다. 당시 타우슨대학 4년에 재학중이던 J군이 한 아파트 단지에 살고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 노상강도에 의해 참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집사 댁으로 달려갔다. 이미 많은 교구 식구들이 모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이집사 내외를 위로 할 지 말문이 막혔다. 이집사 내외의 손을 묵묵히 잡고 기도만 드릴 뿐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이렇게 항변했다. “하나님, 왜 이런 참변이 J군에게 일어나야 합니까?” 나는 우리 교구 식구들이 이집사 내외에게 그 때 보여주었던 위로와 사랑의 손길들을 잊지 못한다.
범인은 다른 곳에서 같은 범죄를 저지르다가 사건 2달 후 체포됐으며 그는 범행을 자백했다. 재판은 볼티모어 시내 법정에서 배심제로 진행됐다. 이 재판은 3일간 계속됐으며 한인 사회에 큰 관심을 몰아왔다. 많은 벧엘교인들을 포함해 이 지역의 많은 한인들이 재판에 참석했다. 나도 재판을 방청했다. 판사, 검사, 관선 변호사 모두 흑인들이었다. 그리고 배심원 12명이 모두 흑인이었다. 피고인은 증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행자백을 뒤엎었다.

배심원들은 피고인쪽으로 손을 들어줬다. 즉 12명 만장일치로 무죄편결을 낸 것이다. 배심원들은 증거에 입각하기보다 인종에 따라 편파적으로 결정했음이 분명했다. ‘O.J. 심슨 편결’과 반대되는 인종차별 편결이 된 것이다. 한인단체들은 물론 지방언론도 배심원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이 지역에 사는 벧엘교인들을 포함한 한인들과 뜻을 같이하는 미국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법원 앞에서 1주일간 항의시위를 벌였다. 피켓을 들고 이 시위에 참석했던 나의 마음은 착잡했다. 공평하고 인권에 입각한 재판이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 사법부에서 ‘인종차별’로 일어난 ‘오판’이기 때문이었다.

이 집사 부부는 아들에 대한 불공평한 평결을 여러 관계기관에 호소했지만 누구 한 사람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 후 이집사 내외는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작은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집사가 미군관계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인 2003년 어느 봄 날 서울 미8군사령부 한 식당에서 만났다. 우리는 이날 30여년 동안 같이 교회를 섬겼던 아름다운 이민생활로 웃음의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집사 내외는 가슴속에 묻혀있는 아픈 상처를 신앙으로 극복하려고 했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5년 전 이곳 집을 정리하기 위해 이집사 부부가 미국으로 왔을 때 이집사와 나는 한식당에서 다시 만났다. “이제 좀 안정을 찾았습니까?” 라고 내가 물었을 때 이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언젠가는 천국에 가지 않겠어요? 그 때 아들과 기쁨으로 재회할것을 소망하며 살고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 온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은 쪼들리는 가난을 벗어보려고, 혹은 공부 좀 더 해보려고, 또 어떤 사람은 빽이 없어도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에서 살아보려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식 공부 잘 시켜보려고, 이런 이유들로 미지의 미국 땅으로 이민들을 왔다. 몇 달 지나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갖고 결혼도 할 젊은 자식을 강도의 총탄에 빼앗긴 부모의 마음을 당해보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리라.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판사, 대심원들, 검사, 변호사 그리고 한인 교포들을 포함안 방청객들앞에서 재판을 받고있던 용의자 젊은 흑인의 모습을 희미하나마 잊지 못한다. 지금 그 젊은이가 어데서 무엇을 하고있는지 알 길이 없다. 복음으로 예수를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새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이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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