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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네트워크] 할아버지와 소년의 들국화

노재원/시카고지사 편집국장

삶의 기억들을 담아두는 창고에 오랜 편린 하나가 있다. 할아버지와 들국화다.

볕 좋은 어느 가을 날 오후, 예닐곱살 소년은 들국화가 만발한 야트막한 언덕을 바쁘게 오르내렸다.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선 하얀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수시로' 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은 노란색, 연보라색, 흰색 꽃들을 더 이상 들 수 없을 때면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자랑스럽게 건네곤 했다. 오후 내내 들국화를 따던 할아버지와 손자는 붉은 노을이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갔다.

한의(韓醫)이자 한학(漢學)에도 조예가 깊었던 할아버지는 말린 들국화로 차를 만들거나 간단한 처방에 활용했다. 따뜻한 물이 담긴 찻잔에 떠있는 들국화 꽃잎은 소년이 보기에도 참 운치 있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대학에 간 소년은 교정의 느티나무에서 적갈색 잎들이 떨어질 때면 할아버지와 함께 걷던 들국화 언덕을 떠올렸다.

수 십년 후 시카고로 삶의 터전을 옮긴 소년은 인상주의 화가 모네를 만나기 위해 시카고미술관을 찾았다. 흐릿한 기억처럼 그려진 수련 연작 앞에서 오랫동안 떠나질 못했다. 그리고 모네의 그림 '양산을 쓴 여인'을 기억해 냈다. 작은 언덕 위의 들풀은 들국화가 됐고 햇별을 가리고 선 여인은 할아버지가 됐다.



시카고의 가을이 깊어간다. 올해는 여름 같지 않은 여름을 보낸 탓인지 가을도 소리 없이 왔다. 가까운 공원이나 숲에 나가보면 가을이 한창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울긋불긋 나부끼는 단풍은 현란하기까지 하다. 유년기의 기억 탓인 지 가을이 오면 높은 곳의 단풍보다 낮은 곳에서 피는 들국화에 먼저 눈길이 간다. 한국에만 있다는 벌개미취는 그렇다 하더라도 잎이 쑥을 닮았다는 구절초와 꽃대마다 여러 송이 꽃이 핀다는 쑥부쟁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그저 들국화로만 생각하지만 가을을 누리는 데는 불편이 없다.

가을 바람은 유난히 가볍다. 그런 바람이 불 때마다 사시나무 은색 이파리와 참나무 갈색 이파리들은 아픈 소리를 내다가 떨어진다. 평소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던 바람은 나무와 들을 만나고서야 제 모습을 드러낸다. 바람이 숲을 지나가고 나면 그제서야 바람 소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자문해본다.

형형색색 단풍과 들꽃에 흰 구름 떠가는 푸른 하늘까지, 가을은 색의 향연이다. 밤하늘을 수놓는 무수한 별들과 그 별에서 발원한 빛이 어우러지는 축제이기도 하다. 가을날 아침 듣는 새 소리는 또 얼마나 청아한가. 홍관조 붉은 머리는 눈부시고 산비둘기 연한 갈색 날개는 은근하다. 일렁이는 물결 위를 유영하는 청둥오리 떼는 한가롭다. 수 십만년 쌓였던 빙하가 녹으면서 일어난 침식 작용에 의해 생긴 수 만개의 호수는 중서부 지역에 사는 이들만 갖고 있는 보물이다.

거리와 마을에서도 가을은 쏟아진다. 물푸레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노란색 이파리들은 황금사원 지붕처럼 빛난다. 그래서 가을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는가 보다. 도로 위를 달려가는 자동차 뒤에서 잰 발걸음을 옮기는 포플러 낙엽은 할 일을 마친 이들의 흥겨운 무도회를 닮았다. 이웃집 뜰에 있는 단풍과 후박나무의 넉넉한 잎은 가을의 풍성함과 여유를 전해온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오랜 불황과 이슬람국가(IS)를 둘러싼 중동 지역의 간단없는 총성과 폭발음, 서아프리카에서 창궐한 에볼라의 습격 등 글로벌 시대 일상은 영 답답하다. 갈등과 불안,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세상은 우울하다.

올 가을엔 어둡고 괴로운 일들은 잠깐 잊고 추억 하나 남기고 싶다. 삶의 기억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먼 훗날 꺼내보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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