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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네트워크] 죽은 자와 산 자의 가르침

노재원/시카고 중앙일보 편집국장

80년대 말 신문사에 입사해 처음 부여받은 업무 중 하나가 부고 기사 정리였다. '구로 삼각(▲) OOO(직책)씨 부친상=X월 X일 X시 △△병원서. 발인 X월 X일 X시, 장지OO. 유가족 누구 누구. 연락처=123-456-789X.' 이름 대부분을 한자로 병기하던 시절인 탓에 '빛날 희(熙)'를 '박정희 희'로, '맏 윤(允)'을 '오징어 윤'으로 불러주고 받아 쓰곤 했다.

얼마전 눈길이 가는 부고 기사들을 잇따라 접했다. 어린 시절 '첫 사랑 누나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배우 김자옥씨가 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타계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늘 밝은 미소를 짓던 그의 죽음은 뜻밖이다. 얼마 전까지 '영원한 공주'의 모습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지난 수 년간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이를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살았다는 기사를 읽으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한국 언론 유일의 건축전문기자로 알려진 구본준 기자가 최근 해외취재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부음은 지인들은 물론 수 많은 독자들에게까지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40대에 불과한 나이도 그렇지만 지칠 줄 모르는 노력과 적극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던 그가 황망히 떠난 후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디쯤인지 의문이 든다.



그는 소외된 곳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소시민들을 위한 '땅콩집짓기'를 통해 세상살이의 또 다른 가치를 제시하고 다른 언론이 잘 찾지 않던 '종삼', '피맛골'로 대표되는 도시의 뒷골목을 누비며 우리네 터전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되살려냈다.

미국 대도시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시장이었던 제인 번 전 시카고 시장이 얼마전 유명을 달리했다. '시카고 시장의 선거 당락은 눈 치우는 능력에 좌우된다'는 시카고 속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77년 시 소비자국장직에서 해고된 그는 예비선거에 출마, 자신을 쫓아낸 당시 마이클 빌란딕 시장을 꺾고 당선됐다. 열세라는 예상이 압도적이었으나 빌란딕 시장이 1979년 초 시카고에 몰아친 눈폭풍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비록 그는 재선에 실패했지만 4년 재임 중 저소득층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각종 차별 철폐에 앞장 섰다.

각각 배우와 기자, 정치인으로 살다가 차례로 이 땅을 떠나면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 이들과 달리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직접 실천하는 이도 있다. 지난 18일 가톨릭 시카고 대교구장에 취임한 블레이스 수피치 주교다.

'빈자의 목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 선택한 미국 가톨릭계 수장인 그는 교황과 닮은꼴 행보를 하고 있다. 수피치 주교는 소외된 자들을 최우선에 놓겠다는 약속과 낮은 곳을 향한 따뜻한 눈길로 종교의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미시간 호변의 명소인 관저 대신 임대 사제관을 거처로 정한 그의 소탈함은 지난 해 취임 후 방문자용 공동숙소를 선택한 교황을 떠올리게 했다.

네브래스카주 크로아티아계 가톨릭 가정의 9남매 중 한 명인 수피치 주교는 취임 미사 강론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은 기적을 내게 기대하지 말아 달라. 나는 물에서 간신히 수영할 정도"라고 말해 참석자들에게 웃음을 안겼다. 목자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그는 "아버지가 사제가 되라고 하셨지만 사실 9남매 중 내가 사제와 가장 거리가 멀었다. 학창 시절 여학생과 파티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담백한 수피치 주교의 온화한 표정은 비록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왠지 모를 위안과 평화를 갖게 한다.

일련의 부고와 수피치 주교의 실천을 통해 죽은 자와 산 자의 가르침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훗날 이 세상과 작별할 때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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