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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네트워크] '갑질' 못지 않게 경계해야 할 '을질'

노재원/시카고 중앙일보 편집국장

갑(甲)과 을(乙). 계약서 등에서 편의상 한 쪽을 지칭하던 갑과 을이란 용어가 느닷없이 새로운 계급 관계 또는 상하 우열을 가리는 말로 둔갑했다.

엊그제 자정 무렵, 24시간 영업을 하는 동네 대형마트를 찾았다. 몇 가지 물건을 구입하고 계산을 하려는데 직원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구입한 물건 중에 주류가 포함된 탓이다. 마침 지갑을 들고 나오지 않은 아내가 "ID가 없다"며 내게 신분증을 대신 보여주라고 했다. "ID가 없다고?" 젊은 백인 계산원이 눈을 치켜뜨더니 우리를 실눈으로 훑어봤다. "ID를 가져오지 않았다. 왜 내 것을 보여주면 안 되냐"고 반문하자 모르는 척 자기 일을 했다. 순간 'ID가 없는 사람들'의 처지가 떠올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손님이 왕이 되는 그 흔한 관계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곡된 갑의 행위, 소위 말하는 '갑질'은 힘이나 권력을 가진 쪽이 약자를 상대로 범하는 부당한 처사이자 폭력이다. '갑질'은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표출될 수 있다.



'땅콩 회항' 사태를 벌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행위가 그렇고 권력의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 청와대 비서관들과 권력 주변부 인사들의 행각이 그렇다. 비무장 흑인에 대한 과도한 공권력 사용으로 무고한 죽음을 불러 온 일부 백인 경찰들의 일탈 역시 갑질에 다름 아니다. 관타나모에서 법과 인권을 무시하고 자행된 고문 역시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갑질의 한 단면이다.

사실 갑과 을의 관계는 무 자르듯 나누기 힘들다. 상황에 따라 갑이 을이 될 수도 있고 을이 갑 노릇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을은 병(丙)에게, 병은 정(丁)에게 또 다른 형태의 '을질' 또는 '병질'을 하기도 한다. 국가 간의 관계는 물론 사회에서 직장에서 단체에서 거리에서 심지어 친구 관계나 가정에서도 갑을이 혼재하는 관계가 존재한다.

갑과 을의 관계 대부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동산과 같은 비즈니스에서 갑과 을은 편의상 매도와 매수자를 나눈 것일 뿐이다. 거래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시장이나 각자의 판단에 따라 합의되고 이뤄진다. 또 갑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섬기는 언행으로 존경 받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심리학 용어 가운데 '공격자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aggressor)'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괴롭히고 공격하는 사람을 의식적으로 싫어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타인에게 똑같은 행동을 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피해, 무기력을 극복하려는 것을 가리킨다. 시집살이를 겪었던 이가 더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킨다거나 폭력 부모 아래서 성장한 사람이 폭력 가장이 되는 것, 윗사람으로부터 잦은 수모를 당했던 이가 아랫사람에게 더 심한 모멸감을 주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갑질은 미성숙과 비뚤어진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와 예의를 갖지 못한 데서 시작된다.

조현아 전 부사장이 기내 직원들을 조금만 배려했더라도 작금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백인 경찰이 흑인 청소년에 대해 작은 인간적 관심과 애정을 가졌더라면 어이 없는 희생과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갑질 못지 않게 을질 역시 경계할 일이다. 남 눈의 티끌은 보지만 제 눈의 들보를 못 보는 것처럼 갑에게 받은 설움을 병에게 을질로 전가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을의 처지에 분노하고 공감하면서도 병과 정에게 그 못지 않은 고통과 아픔을 안기고 외면하는 것은 또 다른 갑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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