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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예수라면 무엇을 자처했을까

기관사가 되었다고 가정하자.

열차는 지금 시속 100마일이 넘는 속력으로 질주중이다. 그때 갑자기 제동장치에 문제가 생겨 열차를 멈출 수 없게 됐다.

저 앞에는 5명의 인부가 보인다. 이대로 가면 그들은 모두 치여 죽게 된다. 상황은 다급하다. 그 옆을 보니 비상철로가 보인다. 방향을 바꾸려 했더니 그곳에는 1명의 인부가 작업중이다. 시간이 촉박하다. 어느 쪽 선로를 택하겠는가.

철학자 필리파 풋이 던진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의 난제다.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에 인용돼 더욱 유명세를 탔다.



보통 1명 보단 5명을 살리겠다는 선택이 많다. 섣부른 결론 도출은 금물이다. 만약 그 1명이 관계성을 가진 '가족'이라면 그래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있겠는가.

항상 가치 판단은 다양한 조건 속에 변형의 성질을 갖는다. 합리적이라 여긴 결론도 절대 자신해선 안 된다.

물론 난제에 정확한 답은 없다. 다만, 트롤리 딜레마는 '공리주의'를 철저히 경계한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기반을 둔다. 이는 다수결 원칙에 이론적 근거로 쓰인다.

하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반드시 옳은가. 다수를 동반한 결정은 항상 위험성을 내포한다. 정당성(다수의 행복) 앞에 소수는 희생되거나 무시될 수 있다. 억압될 여지도 있다.

'좋다 또는 나쁘다'가 반드시 '옳다 또는 그르다'의 명제로 연결될 수는 없다. 다수를 '옳다'로 확정하는 건 신중함이 필요하다.

교계 역시 다수의 논리가 작용한다.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가 '다수'의 개념을 입맛에 맞게 선택적으로 취한다는 점이다. 주장을 펼치거나 권리를 요구할 땐 다수가 유리해서다.

요즘 미국장로교(PCUSA)가 동성결혼 정책을 수용하자 수많은 한인교회가 교단 탈퇴를 고심한다. 결정의 잣대는 다수결이다.

교회 내 교단 탈퇴파와 잔류파의 분쟁은 숫자(교인수)에 따라 힘을 선점한다. 반면 교단과 교회의 다툼은 관점이 달라진다. 일개 교회에 비해 세가 큰 교단이 오히려 다수가 된다. 과연 진정한 다수는 누구일까.

본래 기독교는 다수에 초점을 두는 종교가 아니다. 예수도 그랬다. 늘 소수의 진영에서 본질을 찾았다.

시선은 높은 곳보다 낮은 곳을 향했고,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걸었다. 기독교는 다수일 때 쇠퇴했고, 소수일 때 번창했다. 교회가 세상의 중심을 쟁취하려 할 땐 어두워졌고, 변방에서 진리를 고수할 땐 빛났다.

서로가 다수의 힘을 앞세운다. 그러자 갈등과 분열이 생성됐다. 원망과 분통이 엉겼다.

이럴 때 과연 예수라면 무엇을 자처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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