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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입양가족 김영란씨 "입양 7남매는 내 삶의 버팀목이자 희망"

1.5세 동갑내기 부부
13년간 아이 없자 입양
맏딸·남편 계속 형제 원해
2~3년마다 한국 아동 입양
2015년 출장 중 남편 사망
지난 달 화재로 집마저 불타
"남편 지켜보고 있을 테니
자녀들 열심히 키울 것"


전화 속 목소리가 너무 명랑 쾌활해 처음엔 전화를 잘못 한 줄 알았다. 7남매를 입양해 키우다 2년 전 갑작스레 남편을 잃고 석 달 전엔 함께 살던 친정엄마마저 여의었다. 설상가상 지난 달 집에 불이 나 지낼 곳조차 마땅치 않은 이라곤 상상이 안 갈만큼 그녀는 씩씩했다. 바로 김영란(58)씨다. 지난 시간들 떠올리다 보면 눈시울 붉어질 법도 한데 인터뷰 내내 그녀는 침착했다. 오히려 눈가가 뜨거워 진 것은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 시기만 다를 뿐 누구나 겪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예고 없이 들이닥친 삶의 고통과 동행하는 법을 그녀는 이미 터득한 듯싶었다. 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낙타가 사막을 건너는 법을 알고 있듯.

#남편의 오랜 결심, 입양
18세 때인 1976년 LA로 가족이민 온 그녀는 LA하이스쿨을 졸업 후 캘스테이트 롱비치에서 미술과 성악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동갑내기 남편 김기철씨를 만나 5년 연애 끝 1983년 결혼했다. 남편은 연세대 물리학과 2학년 재학시절 LA에 가족이민 와 대학에서 컴퓨터엔지니어링을 전공했다. 결혼 후 박사과정 중이던 남편은 방위산업체 엔지니어로 취직했고 그녀는 어바인 고급 오피스 빌딩에 기프트·플라워 숍을 열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결혼생활이었지만 결혼 10년이 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는 적잖은 스트레스였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아이를 낳지 말고 한국에서 입양해 키우자고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시할머니께서 고아원 봉사활동 때면 어린 남편을 데리고 다니셨는데 그때부터 남편은 장가가면 꼭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하더라고요. 결혼 전에는 그냥 하는 말이려니 했죠."
그러나 결혼 후에도 남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녀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바꿔 놓은 것은 1997년 우연히 시청한 고아들이 주인공인 '7개의 숟가락'이라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이 드라마 한편만으로 입양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결혼 10년 후 어렵사리 임신을 했지만 3년간 3번이나 유산을 한터였고 무엇보다 그 무렵 시부모님이 부부에게 입양을 적극 권유한 것이 가장 큰 계기가 됐다. 그리고 얼마 후 부부는 한국 김해의 한 영아원을 찾았다.
#가슴으로 낳은 7남매
이후 1년간의 입양절차를 거쳐 1998년 맏딸 한나(24) 양이 이들 부부에게 왔다.
"사실 영아원에 갔을 때 저는 제 품에 안겨 떨어지지 않으려던 여자아이를 입양하고 싶었는데 남편이 한사코 한나를 고집했죠. 그때 영아원에서 한나가 제일 나이가 많아 조만간 고아원으로 옮겨질 형편이어서 남편이 한나를 또 낯선 환경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 해 데려오게 됐죠."
3년 뒤 이들 부부는 그녀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했던 레아(21)양도 입양했다. 그 후 부부는 2~3년 간격으로 레이첼(22), 새라(21), 이사야(18), 노아(15), 제레미아(13)를 공개 입양했다. 이들 중 4명은 영아원을 통해서였고 3명은 미국 한인가정에서 파양된 아이들을 재입양했다.


"남편은 원래 12명을 입양하고 싶어 했어요. 그에 비하면 적은 수죠.(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한나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2년마다 자신이 있던 고아원에 가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을 입양하자 졸랐고 남편도 지원사격을 했죠.(웃음) 처음엔 너무 힘들어 반대했어요. 그런데 선한 일 하자는 남편과 딸을 제가 어떻게 이기겠어요.(웃음)"
부부의 사랑을 먹고 7남매는 무럭무럭 자랐다. 맏딸인 한나는 이제 어엿한 숙녀가 돼 약대 대학원에 진학했고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해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 물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듯 지난 20년간 자녀들 키우며 눈물로 지샌 날들도 있었다. 열 살 때 파양돼 부부가 입양한 노아는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는지 새 가정에 적응 못하고 학교생활도 등한시한 채 방황하는 바람에 부부의 애를 무던히도 태웠다. 그러나 부부가 매일 아침마다 아들을 안고 기도를 했고 1년 뒤 부부의 사랑과 정성 덕분에 아이는 차츰 마음을 열었다. 현재 노아는 지난 학기 GPA 4.0을 받을 만큼 모범생으로 성장했다.
"간혹 남의 새끼 어떻게 키우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어요. 그러나 7남매 모두 배만 안 팠을 뿐이지 다 제가 낳은 자식들이죠. 그러니 공부 못해도, 속 썩여도 다 사랑스러운 내 새끼죠."
그렇게 20년간 7명을 입양해 키우느라 그녀는 일찌감치 사업을 접고 전업주부가 됐다. 덕분에 가계수입은 줄었고 대식구가 살 집을 구할 형편이 못 돼 2002년 친정어머니 권유로 세리토스 친정집으로 이사했다.
#화재로 보금자리 잃어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든 것은 2년 전인 2015년 3월이었다. 출장 차 한 달간 호주에 머물고 있던 남편이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었다.
"남편을 보내고 한동안 우울증에 빠져 살았어요. 앉아도 눈물, 서 있어도 눈물, 운전할 때도 눈물 바람이었죠."
절망 속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그녀의 소식을 전해들은 같은 처지의 교인들이 그녀가 이끌던 중보기도회에 하나 둘 모여들어 위로와 격려를 나누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시간이 가면서 슬픔은 옅어졌지만 7남매와 함께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플로리스트와 웨딩플래너 사업을 재개했다. 그렇게 남편의 빈자리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지난 달 초 차고에서 전기합선으로 시작된 불이 여덟 식구의 보금자리를 태운 것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지난 2월 친정어머니가 지병으로 사망하고 두 달도 채 안 돼 생긴 일이었다. 현재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편과 그녀의 친구 집에서 생활 중이라고 한다.
"급작스럽게 남편을 보낸 것에 비하면 화재야 아무 것도 아니죠.(웃음) 무엇보다 아이들이 있어 든든해요. 물론 화재 후 힘들긴 한데 열심히 아이들 잘 키워야죠. 그래야 이 다음에 남편을 만나도 떳떳할 테니까요. 분명 이 시련도 뜻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담담했지만 씩씩한 목소리였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모래 바람 속, 마른 벼락이 태연히 허락되는 사막 같은 삶의 어느 순간을 지날 무렵 이 나지막한 목소리는 분명 위로가 돼 어깨를 토닥여 줄 것만 같았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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