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윌셔 플레이스] '코먼웰스'가 백인의 전유물이라고?

"전능하신 창조주는 인간을 백인과 흑인, 황인종과 말라야인, 그리고 홍인종으로 나눠 만드시고…." 그 순간 법정이 온통 술렁였다. 대체 판사가 뭘 말하려는 걸까. "각기 다른 대륙에 살게 하셨다. 신은 왜 인종을 따로 살게 한 것일까. 섞여 살지 말라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 아닌가." 백인 방청객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겼다" 환호가 터져 나온 반면 흑인들의 얼굴엔 분노가 가득 묻어났다. 대체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는지. 판사의 말이 맞다고 치자. 그럼 백인들은 왜 이 땅에 살고 있는가. 홍인종, 곧 인디언들이 원래 주인인데.

믿기지 않겠지만 지금으로부터 불과 50년 전, 버지니아주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이다. 그때만 해도 미국, 아니 버지니아는 유색인종이 살기엔 너무 버거웠던 같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언제인데 아직도 흑과 백이 함께 살지 못한다니.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밀드리드와 리처드 러빙은 흑백 커플. 버지니아에선 타인종 간의 결혼은 물론 성관계도 불법이었다. 주 헌법에 그렇게 대못을 박아놨다.

둘은 할 수 없이 워싱턴 D.C.에 가 결혼식을 올렸다. 살다 보니 가족이 너무 보고 싶고 고향이 그리웠다. 그래서 한밤중 몰래 버지니아 땅을 밟은 것. 남편은 흑인 아내를 집에 숨겨뒀지만 곧 이웃의 눈에 띄었다. 경찰에 체포된 부부는 수갑이 채워진 채 법정에 섰다. 사랑한 것이 왜 죄인지 영문을 모른 채.



판결을 내린 이는 레온 바질. 훗날 역사의 단죄를 받았지만 그때만큼은 당당했다. "전능하신 창조주는…." 황당한 구실을 대며 러빙 부부에 1년 징역형을 선고한다. 그래도 미안한 구석은 있었는지 형 집행정지 선심을 썼다. 물론 조건부다. 다시는 버지니아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만 지킨다면. 한마디로 감방이냐, 추방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 아닌가.

부부는 로버트 케네디 당시 법무장관에게 탄원서를 냈다. 마침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민권투쟁과도 맞물려 파장이 컸다. 연방대법원은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린다. 버지니아의 흑백결혼 금지법은 명백한 인종차별이자 백인우월주의를 영속화하기 위한 수단이라며 전원일치 위헌 결정을 발표한 것. 그때가 1967년 6월 12일. 이후 전국의 다인종 가정은 이날을 '러빙 데이(Loving's Day)'로 지정해 갖가지 축하 행사를 펼치며 부부애를 다진다.

얼마 전 샬러츠빌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유혈 폭력시위를 벌여 버지니아가 반세기 만에 또 한차례 역사의 뭇매를 맞고 있다. 주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등 상황이 심상치 않다. 트럼프 대통령조차 극우 백인들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해 기름을 부은 꼴이 돼 버렸다. 왜 또 버지니아인가.

미국 50개 주 가운데 버지니아를 비롯해 켄터키, 매사추세츠, 펜실베이니아 등 네 곳은 주를 '스테이트(state)' 대신 '코먼웰스(commonwealth)' 라고 부른다. 직역하면 '공동 재산'이 되겠으나 원래 뜻은 '공동 복지'가 더 가깝다. 영국 국왕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가 아닌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구성된 민주정부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교과서에 쓰여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 백인 우월주의 집단이 '복지'를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듯해 무더위만큼이나 왕짜증이 난다.

리처드 러빙은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 "난 밀드리드를 단 한 번도 흑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내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일 뿐이다." 인종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는 요즘 누구나 한번 쯤 곱씹어 봤으면 좋겠다.


박용필 / 논설고문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