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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신문 인터뷰서 "동포 도우려 교사 되겠다"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도산 공화국 (3)

1902년 도산 부부 샌프란시스코 도착
한인 드물어 'SF크로니클' 기자 만나
빈털터리 상태서 선교사 도움으로 연명
기회 찾아 남가주 리버사이드로 내려와


도산 안창호는 1902년 10월14일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결혼 직후 4개월 만에 일종의 신혼여행 비슷하게 미국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도산 안창호의 미국 입국 경로와 샌프란시스코 도착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발굴했다.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 도착한 직후 현지 유력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와 인터뷰를 했는데(1902년 12월7일) 그 전면 인터뷰 기사를 필자가 114년 만에 발굴한 것이다. 파차파 캠프에 거주한 한인들의 입국 경로를 찾다가 우연히 찾은 이 인터뷰 기사를 통해 도산 안창호에 대해 그동안 잘못 알려졌거나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이 알게 됐다.

기자는 안창호보다는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문화와 풍습 등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전면 인터뷰 기사의 2/3는 한국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1/3은 안창호가 미국에 오게 된 경위와 목적 등을 서술하고 있다.

이강은 "미국에 도착하기 전 도산 안창호는,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새뮤얼 마페트 목사로부터 평양 장로교회에서 일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다"고 밝혔다.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는 "도산은 현실을 무시하고 복음에만 치중하는 선교사들의 활동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현실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신연자는 자신의 논문에서 "1905년과 1907년 사이에 약 1000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는데, 샌프란시스코는 임시 거주 지역으로 한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새크라멘토 또는 리버사이드 지역으로 떠나 노동자로 일했다"고 밝히고 있다.

도산 안창호는 1902년 10월14일 하와이, 캐나다 밴쿠버, 시애틀을 거쳐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런데 김도형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그것은 바로 "안창호 부부가 1902년 10월7일자로 미국에 입국한 것은 확실한데, 왜 날짜가 다른 두 개의 인장(stamp)이 찍혀 있을까"하는 것이다. 논자는 "하나는 'U.S. Immigration Service, OCT 7 1902, Commissioner'이라고 하여, 1902년 10월 7일 미국 이민국 국장의 인장이다. 또 다른 하나는 'U.S. Immigration Service, OCT 14 1902, Port of San Francisco'이라고 하여, 1902년 10월 14일 미국 이민국 샌프란시스코 항구의 인장이다"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인터뷰 기사로 밝혀졌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전면 인터뷰 기사의 제목은 '한국, 잠자는 나라'이다. 우선 이 인터뷰 기사에서 도산 안창호가 왜 밴쿠버에 도착하여 시애틀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원래 일정은 하와이에서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와이에서 배를 잘못 타게 되어 캐나다 밴쿠버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시애틀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부부는 이미 여비로 가지고 온 돈을 모두 사용해 빈털터리가 된 상태였다. 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 여사는 샌프란시스코에 안면이 있는 사람이나 친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영어도 못했기 때문에 도움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안창호 부부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을 배회하였는데 우연하게도 알렉산드로 드루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드루 박사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안창호는 그와 안면이 있었다.

드루 박사는 도산 안창호 부부가 처한 사정을 듣고 자신의 집인 이스트 오클랜드로 데리고 갔고 안창호 부부는 그곳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기거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도산 안창호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체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스트 오클랜드다. 당시는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하는 다리가 건설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페리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만을 건너야 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인터뷰의 대부분은 한국의 이상한 풍습과 서울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와 이혜련 여사가 미국에 온 이유와 상황은 마지막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도산과 부인을 인터뷰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기자는 안창호 부부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어느 저녁에 이상한 외국인 부부를 만나기 위해 이스트 오클랜드를 찾았다. 부부는 알레산드로 드루 박사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드루 박사는 의사로, 그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서 약 8년 동안 거주하다가 최근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기자는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이 부부가 왜 한국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왔는지 알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기자는 안창호 부부와의 인터뷰 첫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인들이 들어왔는데 미국 옷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중국인 평균 키보다 조금 컸는데 일본인 또는 인디언과 비슷했다. 조그만 체구의 여성은 일본인과 매우 흡사했다."

인터뷰는 악수를 하고 서로 소개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남성은 24세이고 부인은 19세인데 드류 박사가 남성을 '안'으로 소개하면서 그 이름에는 '평화'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또한 이름에 '행운'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의 이름은 '행운의 평화'인 셈이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자에 따르면, 안창호는 드루 박사에게 통역을 부탁하면서 "기자에게 나를 찾아 온 것이 영광이라고 전해 달라. 나중에 호의에 대한 답례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자는 안창호의 이러한 정중한 태도에 당황했다고 한다.

도산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물 안 개구리인 조국을 위해 교사가 되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당시 25세였던 도산은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는 서양인을 악당이라고 생각했지만, 서울에서 구세학당을 다니면서 서양인을 본 뒤 생각이 달라졌다. 동포를 도우려면 외과의사가 되는 것이 좋겠지만 마음이 약해 수술을 집도할 자신이 없었다"며 "교사가 장래의 꿈"이라고 말하였다. 인터뷰를 마친 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본사를 견학한 도산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느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도산은 이후 '공립신보 (1905년)', '신한민보(1909년)' 등 신문을 창간했는데 이것은 신문사 견학을 통해 신문의 중요성을 깨달은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는 도산 안창호와 아시안 이민자들에게는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도산은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기회의 땅 남가주에 위치한 리버사이드로 이주하게 된다. 미국 최초의 한인타운 또는 한인 마을이 처음으로 생긴 리버사이드. 당시에는 파차파 캠프 또는 도산 공화국으로 불렸던 미국 최초의 한인타운, 그곳으로 가 본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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