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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광장] 실향민의 추석 명절

다시 추석이 가까이 오고 있다. 오곡이 무르익고 멀리 떠났던 가족이 돌아오는 즐거운 추석이다.

즐거워야 할 명절이 올 때마다 한이 되살아 나는 가정이 있다. 분단의 아픔을 품고 살아온 1000만 이산가족일 것이다.

이산가족들의 자식들은 추석 제사상을 차리는 어머니의 응어리진 한숨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두고 온 부모님들의 사진과 부고를 제사상 앞에 붙여 놓고 엎드려 부곡을 하며 눈물로써 불효자의 한을 달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이른 봄날 하루해가 정오를 지나는 오후에 안마당에서 흙 놀이를 하던 철부지 코흘리개는 솟을대문 밖에서 왁자지껄 소리에 바깥채 대문 쪽으로 뛰어갔다. 청년으로 보이는 7~8명의 장정들이 왼쪽 팔뚝에 붉은 완장을 차고 내 키보다 더 큰 지게 작대기를 하나씩 들고 할머니와 언쟁을 했다. 똑똑하고 야무지기로 집안에서 소문난 할머니도 결국 그들의 마지막 통보에 입을 다물었다.



"24시간 내에 이 집을 비우고 100리 밖 북쪽으로 이사 가시오!" 공산당원의 마지막 통첩이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알았지만 김일성 주석이 북한 통치를 시작하면서 사회주의 완성을 위해 지주계급을 숙청했다. 1차 숙청이 1947년, 2차 숙청이 1948년에 있었다. 그 당시에 아버지는 읍내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계셨다. 의사들은 1차 숙청에서는 면제되었지만 2차 숙청에서는 그냥 지나가지 못했다. 집안의 농토를 관리하는 소작이 10집이 넘었다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집안식구들과 10명의 삯꾼들을 사서 북쪽이 아닌 평양으로 왔다. 꼬박 일주일이 걸려 개성의 월남 피난민 수용소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꼼짝도 안 하셨다고 한다. "나는 대대로 내려오던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간다." 맏아들인 아버지의 애끓는 호소에도 막무가내였다. 공산당원으로부터 24시간 최후통첩을 받은 날 밤 할머니는 곡간에 가득한 종이와 한지를 안마당 한복판에 갖다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을 지르셨다. 당시 종잇값이 금값이었다고 한다. 이 귀한 종이를 그놈들(공산당원)에게 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고향에 남겨둔 채 서울로 오셨다.

필자의 집안은 철저한 유교 집안이었고 매해 공자 제사를 지내는데 할아버지가 제주셨다고 한다. 양반 중에서도 흠 없는 양반 아니면 제주 노릇을 못하기 때문에 양반 자랑을 하실 때면 빼 놓지 않는 단골 메뉴였다.

월남 생활과 6·25 전쟁 피난 시절에도 한시도 추석과 설날, 제사를 거른 적이 없으셨다. 어려서부터 즐거워야 할 추석명절에 할머니의 사진과 제단 앞에서 항상 한 맺힌 아버지의 눈물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제 70년이 지났다. 북에서 내려와서 살고 계신 이산가족들이나, 조국을 두고 이곳에 와서 자식들을 위하여 모진 젊음을 보내시고 빈 둥지만 지키는 우리의 부모님들과 이웃 어르신들께 이번 추석만이라도 한 사발의 떡국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영송 / 코리아타운 시니어 커뮤니티 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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