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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네트워크] 우리 자연사하자

노래 중간에 말 한마디가 스쳐 지나간다. '아플 땐, 의사보다 퇴사'라고 권한다. 의사와 퇴사, 말끝 운율을 맞춘 재치는 알겠지만 뒷맛은 썩 개운하지 않다. 그런 가사를 집어넣은 배경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직장생활이 얼마나 힘겹기에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대신 차라리 회사를 떠나라고 하겠는가.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는 '우리 자연사하자'의 한 대목이다.

이 노래는 흥겹다. 가볍고 경쾌한 리듬에 맞춰 '우리 자연사하자'를 주문처럼 읊는다. 3분 길이 노래에 이 가사만 24번 등장한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여성 듀오가 어깨를 좌우로 들썩이고, 두 팔을 상하로 흔든다. 중독성이 강해 두세 번만 들어도 노래가 입에 달라붙는다. 생로병사는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숙명,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다 흙으로 돌아가는 게 이치건만 이들은 대체 왜 자연사, 자연사를 외고 있는 걸까.

이들 듀오는 데뷔 10년을 맞은 미미시스터즈다. 이 노래는 당초 자살 방지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무한경쟁의 시대, 너나없이 성공을 향해 치닫는 사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불행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을 담았다. 그래서 이들은 노래한다. '5분 뒤에 누굴 만날지 5년 뒤에 뭐가 일어날지 걱정하지 마'라고 말한다. '걱정 마. 어차피 잘 안 될 거야' '너무 열심히 일하지는 마. 일단 내가 살고 볼 일이야' '힘들 땐 힘들다, 무서울 땐 무서워 말해도 괜찮아'라며 또래들을 응원한다.

노래의 메시지에 시비를 걸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자연사마저 '버킷 리스트'에 들어간 서글픈 역설엔 동의하기 어려웠다.



자연사의 사전적 의미는 노쇠하여 자연히 죽음, 또는 그런 일이다. 의학적으론 자살·피살·사고사·약물중독 등에 따른 외인사(外因死)와 대비된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은 자연사에 포함된다. 통계를 뒤져보니 지난해 한국인의 외인사 사망 비중은 9.5%. 그중 절반가량을 자살이 차지했다. 특히 10~30대에서 자살은 사망 원인 1위였다. 이른바 위험·피로·성과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다. 얇은 얼음장을 디디며 살아가는 꼴이다.

시간을 거슬러 영화 '고래사냥'(1984)을 다시 찾아봤다. 20세기 한국 청춘영화 대표작으로 꼽히는 수작이다. 볼품없고 자신감도 하나 없는 철학과 대학생 병태(김수철)가 고래를 찾겠다며 거지왕초 민우(안성기)와 말 못하는 사창가 여인 춘자(이미숙)와 함께 동해로 떠나는 얘기다. 그 이전에 송창식의 노래로도 유명했다.

제5공화국의 폭압이 극심했던 시절, 공부도 연예도 젬병인 병태는 집·가족·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자기 나름의 모험에 나선다. 뭔지는 모르지만 삶의 의미(고래)를 잡겠다는 의지는 분명했다. 지금 돌아보면 목표가 허망하고, 작품도 낭만적이지만 오늘보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님 찾아 꿈 찾아 나도야 간다'라는 김수철의 노래가 지금도 생생하다. 지난 30여년간 우리네 청년은 그만큼 더 쪼그라진 걸까.

2018년으로 되돌아온다. 한국인의 수명을 살펴봤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신생아의 기대수명은 평균 82.4세. 80년에는 66.1세였다. 36년 사이 16.3년 늘었다.

요컨대 자연사를 우려할 단계가 아니다. 고령화사회가 더 걱정이다. 그럼에도 자연사 노래가 튀어나온 오늘이다. 이 지독한 모순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작가 최인호(1945~2013)는 '젊은이들은 사화산이 아니라 휴화산'(74년 청년문화선언)이라 했다.

그 잠들어 있는 마그마를 정녕 깨울 수 없는 걸까. '자~떠나자. 동해바다로~'.


박정호 / 한국 중앙일보 문화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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