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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비스타 캐년을 걸으며

봄이 성큼 다가온 상쾌한 아침, 친구들과 하이킹을 갔다.

8년 전 비스타 캐년에 처음 갔을 때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으로도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캐년 입구의 넓고 탁 트인 공원에 서니 걸어갈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경사진 언덕길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구름처럼 가벼웠다.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실바람은 열쇠로 잠근 가슴도 활짝 열 듯했다. 우린 좁은 길을 둘씩 짝을 지어 걸었다.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길에도 곳곳에 옹이가 박혀 있었다. 옹이에 걸려 아차 하는 순간마다 인생의 질곡이 여기도 있다고 느꼈다. 호미라도 있으면 빼내고 갈 텐데, 뒤에 오는 누군가가 다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걸었다.

울창한 숲 속으로 접어들자 모두가 환호했다. 즐비한 고목들과 하늘을 덮으며 얽혀있는 아름드리나무에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숲에는 깨끗한 물이 아낌없이 흘렀고 맑은 공기가 폐 깊숙이 흘렀다. 계곡물 주변에는 돌 미나리가 수북이 자라고 졸졸졸 물소리가 머릿속을 맑게 씻어주었다. 시원한 봄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몇 개의 손을 가졌을까. 얼굴도 어루만지고 손등도 간질이며 머리도 빗어주었다. 바람은 부드럽게 쓰다듬지만 어느 때는 거칠게 잎사귀를 찢고 가지도 꺾는다. 그럴 때는 바람도 아플까.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몇 백 년은 됨직한 우람한 나무의 왼쪽 가지가 뚝 잘려있다. 지날 때마다 경탄하며 한참을 바라보던 나무였다. 지난번 왔을 때도 그대로였는데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에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일까. 지나는 사람들도 아쉽고 섭섭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무 앞 벤치에서 찍었던 사진은 이제 추억이 되어버렸다. 한쪽 옆 개울가에 잘라놓은 나무토막으로 만든 작은 쉼터가 있었다. 우리는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쉼터에 앉아 간식을 먹었다.

멤버 네 명 중 누군가 먼저 우리 곁을 떠난다면 우리가 걷는 이 길에 미풍으로 돌아와 우리들 볼을 만질까? 아니면 지저귀는 새소리로 찾아올까? 그도 아니면 우리가 앉아서 담소하던 나무토막 의자에 미리 와 “나 여기 있어”라고 바람소리를 낼까?

계곡을 사이에 두고 우린 또 걸었다. 덤불 아래 피어 있는 보라꽃. 누가 찾아주지 않으면 외롭게 피었다가 슬프게 시들어버릴 것 같은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었다.

나는 산과 들에 피는 야생화가 너무 좋다. 골짜기 옆 큰 바위의 벼랑 끝에서 기어 올라오는 어린 노란꽃에서는 슬픔의 냄새가 났다. 예쁜 꽃인데 아무도 안 봐주니 기를 쓰며 오르고 있었다. 잎사귀 사이에 숨은 하얀꽃은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오면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잠든 꽃은 누가 깨우는 걸까. 흐르는 개울 물소리가 깨울까. 쌔근쌔근 바람의 숨결이 깨울까. 나는 유난히 이곳 바람이 좋다. 꽃을 탐하는 벌도 나비도 보이지 않는 이곳 숲이.

먼 산 정상 위로 알리소 캐년 산자락이 보였다. 저기쯤 소카 대학이 있을 것이다. 지난번 두 차례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곳이라 더욱 반가웠다. 안개 걷힌 캐년의 능선 위로 청잣빛 하늘이 눈부시다. 서로 격려하면서 만육천 보를 걸었다. 자연의 품에 안기니 나의 녹슨 감성도 꽃이라도 된 듯 새롭다. 정오의 봄 햇살, 눈이 부시다.


엄영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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