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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믿지 않던 남자, 불사조가 됐다

탄생 80년 이소룡 특집 ‘사망유희의 인생’
서구에선 철학자로도 대접
의문의 죽음이 아이콘 강화

이소룡은 1940년 11월 2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살아있다면 올해로 80세다. 1973년 7월 20일 33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망자가 된 지 47년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이승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스크린에서 대체 불가능했던 강렬한 캐릭터였던 그는 지금도 영화와 격투기의 선구자로 살아있다. 그가 태어난 지 80년 되는 해에 그가 남긴 전설과 깊은 족적을 삶과 영화 두 갈래로 추억한다. 〈편집자주〉

이소룡과 부인 린다 에머리, 아들 브랜던. 에머리는 19세에 이소룡과 결혼, 아들 브랜던과 딸 새논을 낳았다. 지금도 ‘브루스 리 재단’을 운영하며 이소룡의 철학과 무술을 알리고 있다.

이소룡과 부인 린다 에머리, 아들 브랜던. 에머리는 19세에 이소룡과 결혼, 아들 브랜던과 딸 새논을 낳았다. 지금도 ‘브루스 리 재단’을 운영하며 이소룡의 철학과 무술을 알리고 있다.

1963년 여름 시애틀의 가필드 하이스쿨에 재학 중인 린다 에머리는 쿵푸 클래스에 등록한다. 지도교사는 인근 워싱턴 대학의 재학생이었다.

린다는 이듬해 쿵후 선생님처럼 자신도 쿵후 선생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같은 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1년 후인 1965년, 19살의 나이에 쿵후 선생님과 결혼한다. 그 선생님은 다름 아닌 브루스 리였다.

용의 해, 용의 시에 태어나다



올해는 이소룡 탄생 80주기를 맞는 해이다. 단순히 성공한 배우 이상의 영역에서 7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소룡은 1940년 11월 27일 오전 8시경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출생했다. 1940년은 중국인들에게는 경계와 보호의 상징인 용의 해였는데 마침 그가 태어난 시간도 용의 시(오전 7시에서 9시)였다.

이소룡은 유명 경극 배우 이해천과 명문가 집안의 딸인 하애유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소룡은 사실 순수혈통의 중국인이 아니다. 어머니 하애유는 중국인과 독일계 백인의 혼혈이었다.

이소룡은 홍콩 구룡에서 성장했다. 그가 무술에 입문하게 된 배경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몸이 연약했던 이소룡이 신체단련을 위해 태극견을 연마하기 시작했다는 설과 배우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중국 전통무술 홍가권을 배웠다는 설이 있다.

불량학생으로 성장기를 보내다

어린 시절 이소룡은 불량학생이었다. 배운 무술로 패싸움을 하기 일쑤였다. 19살 되던 해 홍콩의 마피아 조직 삼합회 간부의 아들을 폭행하여 집에 경찰이 찾아왔다는 일화가 있다.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버지는 미국 출생의 이소룡에게 100달러를 쥐여 주고 샌프란시스코의 고모에게 보낸다.

19세에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소룡은 문제아였던 어린 시절과는 사뭇 다르게 철학과 심리학 등에 관심을 보이는 ‘사유하는 청년’으로 변모해 있었다.

무술은 도에 이르는 과정

이소룡의 프로필을 소개하는 영어판 인명사전에는 배우, 감독, 마샬 아트 매스터 외에 ‘필로소퍼’(Philosopher)로 명기한다. 무술에 대한 이소룡의 진지함을 철학의 경지에서 이해하려는 서구인들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소룡은 1971년 캐나다 기자와의 인터뷰 중 “물이 되어라, 친구여”(Be Water, My Friend)라는 어록을 남긴다. 물처럼 자유로운 마음을 무술에 적용한 그가 인위를 초월한 도가사상에 심취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망유희’에 찬조 출연한 카림 압둘 자바(LA 레이커스)를 비롯, 무술을 통해 이소룡과 교류를 나누었던 할리우드 스타들은 척 노리스,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로만 폴란스키, 샤론 테이트 등이 있다.

갑작스러운 의문사…의혹과 괴담들

이소룡은 1973년 7월 20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관한 음모론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홍콩 마피아 삼합회 관련설, 가라데를 얕잡아 본 것에 분노한 일본 무술가들의 개입설, 이소룡이 쿵후를 상업화하였다는 비난을 쏟아내던 중국 무예인들의 자연사 위장설, 영화 관계자의 암살 사주설 등이 떠돌아다닌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소룡의 사망 발표 후 유족들을 비롯해 관계자들이 계속 말을 바꾸는 과정에서 의혹은 더 커져만 갔다. 은폐를 시도한 정황들도 제기됐다.

이소룡은 ‘사망유희’ 촬영 도중 위험천만의 총기사고를 겪는다. 이로부터 22년 후 이소룡의 아들 브랜던은 ‘크로우(Crow·1995)’의 촬영현장에서 총기사고로 숨지게 된다. 이소룡의 전설이 계속되는 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세간의 억측과 논란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죽어도 죽지 않는 현재태의 남자

이소룡은 내일을 믿지 않았던 남자였다. 짧은 인생을 살다 갔지만 굵은 삶을 살았던 그는 죽음 이후 오히려 영원히 살아 있는 ‘불사조’로 다시 태어났다. 그의 사망 후 47년이 흘러갔지만 세계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남아 지금 이 순간도 회자하고 있다.

이소룡은 50여년 전 할리우드 영화계에 ‘잠재태’로 나타나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그를 흠모했던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영원한 ‘현재태’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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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이 없었다면 MMA(종합격투기)도 없었다”

이소룡은 왜소했다. 그러나 격투 시 파괴력은 엄청났다. UFC를 부동의 세계 1위 종합격투기 단체로 만든 데이나 화이트는 이소룡을 ‘MMA의 아버지’(the Father of MMA)라고 부른다. “이소룡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UFC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말은 이소룡이 영화뿐 아니라 격투 분야에서도 널리 추앙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UFC 페더급과 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낸 코너 맥그리거는 어린 시절 ‘용쟁호투’를 보고 난 후의 소감을 “충격 그 자체였다. 그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브루스 리가 살아 있었다면 MMA의 챔피언이 되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소룡의 격투는 방어에 치중한다. 많은 격투기 파이터들이 강한 근육에서 나오는 공격에 치중하고 있는 반면 이소룡이 창시한 ‘절권도’는 상대방의 가격을 저지하는데 더 많은 비중을 둔다.

유일하게 기록된 그의 실전 영상을 보면 이소룡은 상대에게 단 한 번의 가격도 허용하지 않는다. 상대 선수는 이소룡을 공격하는 순간 오히려 가격을 허용한다. 이소룡은 예리한 눈으로 상대의 동작을 파악하고 동물적인 민첩함으로 유효타를 적중시킨다. 그의 동작들은 물처럼 흐르는 듯 유연하며 춤을 추는 듯 경쾌하다.

오늘날의 세계적인 쿵후 스타 성룡과 죽은 이소룡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홍콩의 한 매체는 컴퓨터를 동원, 두 사람을 대결시킨 적이 있다. 실전 이상으로 흥미진진했던 이들의 가상대결을 살펴보면 맨손으로 맞붙었을 경우 파괴력에서 이소룡이 단연 우세했다. 받아치기의 명수 이소룡의 민첩하고 날카로운 공격이 ‘곡예사’ 성룡에 비해 훨씬 돋보였다. 가상대결은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성룡은 무명 시절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에게 얻어맞고 쓰러지는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그는 여러 장면에서 스턴트맨으로도 기용됐다. 그런데 이소룡의 가격에 성룡이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소룡은 미안한 나머지 성룡이 이후 배우로서 대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성룡은 이소룡이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다고 회고한다.


김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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