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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뵤오~” 괴성, 아시안 영화의 벽 깼다

탄생 80년 이소룡 특집 ‘용쟁호투의 영화’
당산대형·정무문 무술영화 새 지평
성적 매력 없는 아시안 이미지 깨

이소룡은 1961년 워싱턴 대학에 입학한다.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TV와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던 이소룡은 배우가 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공과목은 철학을 택했다.

이소룡 부자의 묘소. 전설의 무게감이 절로 느껴진다. 이소룡의 처가가 있는 시애틀 레이크뷰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이소룡 부자의 묘소. 전설의 무게감이 절로 느껴진다. 이소룡의 처가가 있는 시애틀 레이크뷰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무술을 향한 탐구도 계속됐다. 중국의 전통무술에만 매달리지 않고 복싱, 유도, 태권도, 가라데 등을 섭렵하면서 프리스타일을 강조하는 ‘절권도(JeeKune Do)’의 창시자가 되는 배경이 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다

이소룡은 시애틀에서 ‘진번쿵후(振藩功夫)’라는 마샬아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생계유지도 어려웠다. 1967년 거주지를 LA로 옮긴 그는 새로운 도장을 열었다.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그의 도장에서 무술을 배웠다.



이때부터 이소룡은 영화 오디션에 응모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제자였던 제임스 코번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도움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캐러딘과도 교류하면서 여러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당시의 할리우드는 아시안 배우도 드물었고 아시안들에게 배역을 맡기기를 꺼렸다. 이소룡의 투박한 영어발음도 장애였다. 1972년부터 ABC가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쿵후’는 애당초 이소룡의 아이디어와 제안으로 제작 논의에 들어간 작품이었다. 1800년대 후반 서부시대의 소림승이 미국을 떠돌면서 악당들을 제압하는 내용의 이 드라마에 이소룡은 자신이 주인공으로 출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역은 결국 무술 경험이 거의 없는 캐러딘에게 돌아갔다. 할리우드에 실망한 이소룡은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고 홍콩으로 돌아간다.

홍콩은 당시 검술이 주종을 이루던 이전의 무협영화에서 맨주먹으로 싸우는 격투 방식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우라는 배우가 ‘용쟁호투’의 대성공으로 무술영화계의 선두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홍콩 사람들은 신예 이소룡의 출현을 반겼다. 그가 출연했던 미국 드라마 ‘그린 호넷(Green Hornet)’은 미국에서는 실패했지만, 홍콩 사람들은 쿵후 장면이 자주 나오는 이 드라마를 즐겨보고 있던 차였다. 이소룡이 연기한 역은 ‘가토’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홍콩 사람들은 중국인 배우가 미국 드라마에 출연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흥분하고 있었다.

쿵후영화의 전성기를 이루다

이소룡은 홍콩 최대의 영화사 쇼 브라더스를 찾아갔다. 미국에서의 활동 경력을 인정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반대로 쇼 브라더스의 사장은 이소룡의 건방진 태도를 못마땅해하며 그를 쫓아내다 시피했다.

쇼 브라더스에서 독립해 나온 골든하베스트가 발 빠르게 이소룡에게 두 편의 영화제작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영화가 ‘당산대형(The Big Boss)'과 ‘정무문(Fist of Fury)'이었다. 이소룡이 쇼 브라더스와의 계약 체결에 실패하고 골든하베스트와 인연을 맺은 것은 영화사에서 대표적 ‘전화위복’ 중 하나로 기록된다.

1971년 ‘당산대형’으로 흥행기록을 세운 이소룡은 이듬해 다시 ‘정무문’으로 그 기록을 경신했다. 이소룡은 콩코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스스로 제작, 각본, 감독, 주연, 무술 지도를 겸한 ‘맹룡과강(The Way of the Dragon)’으로 또다시 자신의 흥행기록을 경신한다.

이 무렵 이소룡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무술을 가르쳤던 제자들과의 인맥을 통해 무술 지도를 담당하는 일을 지속하고 있었다. 잉그리드 버그만, 안소니 퀸 주연, 중년의 로맨스를 그린 ‘봄바람(A Walk in the Spring Rain, 1971)’의 격투 장면을 이소룡이 안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퀜틴 타란티노의 패러디 논란

이소룡을 상징하는 것 중에는 “아뵤오~”라는 ‘괴음’이 있다.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이소룡의 포효는 당대의 사운드 아이콘이었다. 이 기합 소리에 이어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쓱 만지며 상대를 비웃었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패러디되고 있다. 잘 다듬어진 몸매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대를 응시하는 이소룡의 모습은 아마 영화사에서 가장 많이 패러디되는 장면일 것이다.

이소룡 패러디의 대표적인 사례는 ‘할리우드의 악동’ 퀜티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우마 서먼은 이소룡이 ‘사망유희’에서 입었던 노란색 츄리닝을 입고 현란한 액션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 이소룡에 대한 타란티노의 오마주였다.

그러나 브루스 리 마니아로 알려져 있던 타란티노는 근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이소룡을 ‘한물간 배우’로 등장시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주인공 클리프(브래드 피트)가 건방진 캐릭터로 묘사된 이소룡을 때려눕히는 장면 때문이다. 이소룡의 팬들은 이 장면을 전설적 아시아계 배우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소룡의 딸이며 배우인 새넌 리는 “타란티노가 유족과 상의도 없이 영화에 등장시켜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했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타란티노는 침묵으로 일관하다 “이소룡의 아내가 쓴 자서전을 참고했고 이소룡은 실제로 건방진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클리프는 허구적 인물”이라고 변명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이소룡의 패러디들은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는 전설임을 상기시켜 주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평가해도 좋을 듯하다.

아시안 편견 해소에 큰 역할

이소룡은 미국 영화에서 묘사하고 있던 아시안들에 대한 인상과 편견을 깨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70년대 그가 미국의 대중문화에 몰고 온 ‘쿵후 바람’은 그간 미국인들이 갖고 있던 ‘왜소하고 찌질하며 성적으로 매력 없는 동양 남자’의 이미지를 해소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소룡은 또한 오락물 차원에서 맴돌던 홍콩영화를 다른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이소룡 이후 무술 영화가 대종을 이루던 홍콩의 액션 영화는 누아르 형식을 띤 또 다른 장르로 발전하면서 보다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을 유혹했다. 아시아 영화가 동양권을 벗어나 구미 등 서양권 영화시장을 깊숙이 파고들 수 있게 된 데는 이소룡이 선봉장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소룡 이후 아시아계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이 수월해졌다. 할리우드는 이들이 이소룡의 이미지를 재연해주길 원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설을 능가하는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이소룡의 아류’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불행한(?) 배우들이었지만, 대신 이소룡이 생전에 누리지 못했던 할리우드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


김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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