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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고대 로마 도시로의 여행

백종춘 객원기자
백종춘 객원기자

[LA중앙일보] 발행 2019/05/17 미주판 25면 기사입력 2019/05/16 20:05

폼페이 유적지

1400년 넘어 다시 세상으로
비극과 향락의 생활상 생생

 폼페이의 중심부인 폼페이 광장 너머로 도시를 사라지게 했던 베수비오 화산이 손에 잡힐듯 선명하게 다가온다. 고대의 유적이 이렇게 고스란히 현대에 되살린 공 역시 화산에 돌려야 한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폼페이의 중심부인 폼페이 광장 너머로 도시를 사라지게 했던 베수비오 화산이 손에 잡힐듯 선명하게 다가온다. 고대의 유적이 이렇게 고스란히 현대에 되살린 공 역시 화산에 돌려야 한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는 동안 휴게소에서 에스프레소까지 한 잔 하느라, 3시간 정도 걸린듯싶다. 그리 멀지 않은 앞바다에는 아름답기로 이름난 카프리섬이 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그리고 영국 찰스 황세자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곳으로 가자면 반도 끝 소렌토에서 배를 타야 한다.

오늘은 로마 제국의 고대도시, 폼페이로 간다. 당시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귀족들의 휴양지로 번영을 구가하던 폼페이는 79년 8월 24일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던 베수비오산의 화산이 폭발하면서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분출물에 묻혀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로부터 1400여 년이 지난 1594년 이 도시 위로 운하공사를 하던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면서 폼페이는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다. 유럽 어디를 가건 로마제국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있을까만 그러한 대부분의 도시들은 시대의 변천과 함께 하는 통에 몇몇 거대한 유적들만 남겨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하루 아침에 역사 속으로 퇴장했던 만치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세상에 돌아온 것이다. 그를 사라지게 했던 화산재가 다시금 천년의 세월을 넘겨서 되돌려 놨으니, 아이러니하다.

비로소 하나의 도시이자 전체가 박물관인 폼페이를 마주하고 섰다. 예전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 하구의 항구도시였던 까닭에 정문 이름도 '항구로 통하는 문'(Porta Marina)이다.

희생자의 석고상

희생자의 석고상

중심가의 석재 도로

중심가의 석재 도로

홍등가의 내부 모습

홍등가의 내부 모습

정문을 지나자 곧 넓은 광장을 만났다. 폼페이의 중심인 광장(Foro)으로 시민광장 혹은 북쪽에 주피터 신전이 자리하고 있어서 주피터 광장으로도 불린다. 이곳에 공회당을 뜻하는 바실리카(Basilica) 건물이 서 있다. 법정과 관청으로 쓰이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웅장한 모습은 사라지고 28개가 있었을 원주의 기단부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멀리 베수비오 화산이 손에 잡힐 듯한 이곳에서 각종 공공행시가 치러지고, 시장이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주피터 신전과 함께 아폴로 신전도 있으니,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광장에서 석상을 비롯해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됐는데, 모두 나폴리 국립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폼페이와 더불어 이 박물관까지 보고나서야 비로소 폼페이 여행의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고 하겠다.

광장 양쪽의 회랑은 당시 곡물 계량소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임시로 전시해 놓았다. 각종 그릇과 생활용품 등이 주를 이루는데, 그 중에는 최후의 날에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람들의 석고상도 있어 그날의 참상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이 석고상은 기존의 화석과는 달리 화산재에 묻힌 시체가 썩어서 사라지고 마치 거푸집처럼 남은 화산재 속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만든 것이다.

광장을 지나 다시금 큰길에 나섰는데, 2차선 도로였을 법한 포장도로에 눈길이 간다. 다양한 크기의 돌들을 다듬어 큰 이음매 없이 포장을 했다. 이음매 곳곳에 하얀 돌들이 박혀 있는데, 반사석이란다. 밤이면 달빛이나 횃불에 빛났을 이 도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군데군데 징검다리처럼 놓인 돌들은 마차의 과속 방지턱 같은 역할에다 빗물 혹은 오수에 보행자가 젖지 않도록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들이 살았던 주거지역으로 들어섰다. 이곳에는 로마 귀족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저택들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정신 없이 도시의 이곳저곳을 훑다보니, 목욕탕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발굴된 세 개의 목욕탕 중에서 이곳은 대중탕인 '광장 목욕탕'이다. 당시 로마인들은 거의 매일 같이 목욕을 즐겼는데, 이를 위해 수원지로부터 물을 끌어오는 수도교가 필수였다. 스페인의 세고비아에서 만난 수도교는 여전히 '200년 현역'임을 자랑하지 않았던가. 욕탕 안으로 들어서니, 그 장식이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고도 정교하다. 천정에 맺힌 물방울이 양 옆으로 흘러내리도록 주름을 파 놓은 것 하며, 군데군데 채광창겸 환기구가 정교하기가 이를데 없다. 온탕, 냉탕 그리고 휴게실과 운동시설까지 갖춰져 있다.

큰길을 따라 걷자니 어느 건물 앞에 유난히 많은 여행자들이 몰려 있다. 기다리고 기다려 건물로 들어섰다.

좁은 방들이 늘어서 있는데, 머리 위 그림을 보고서야 이 집의 용도가 가늠이 됐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춘화도에 비교될 법한 남녀의 성행위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체위도 다양하다. 당시의 홍등가였던 곳이다. 이처럼 발굴된 많은 자료들을 통해 폼페이가 상당히 쾌락적이고 현세 향락적인 도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이 타락한 폼페이 시민들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해석들이 나오는 이유다.

아직 도시의 절반도 보지 못해 마음은 바쁜데, 멀리 뭉게 구름을 이고 선 베수비오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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