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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무는 푸른 소다

나무처럼 살 수는 없을까
세상을 묵묵히 관조하며

부는 바람에 흔들려줘도
확고히 선 자세 닮고 싶어

나무들이 누워 있다. 집 뒷마당에는 전나무 두 그루와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째 파헤쳐 속내를 하늘로 뻗치고 늘어졌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고 했던가. 의외로 흙덩어리들이 매달린 뿌리는 옆으로 넓게 뻗어 나가서 길이의 열 배는 넘어 보였다. 뿌리는 얽히고설키면서 땅속에서 양분을 모으고, 균형을 잡아주었다. 묵묵히 나무를 지탱하고 튼튼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생명선이다. 이제 물길을 잡아서 가지로 전달해 주지도 못하고, 바람으로부터 나무를 지켜 줄 수도 없다.

뿌리가 정화조 파이프를 뚫어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굴착기로 밀어내고 새로운 파이프로 교체하는 공사를 해야 한다. 나무를 뽑을 필요까지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는 불편을 생각해 보란다. 생리현상이 발생할 때마다 참으며 옆집이나 근처의 낯선 곳으로 달려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라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마음에 걸려 발꿈치를 잡아당겨 저녁 내내 창밖으로 눈길이 갔다.

이틀 동안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로 서둘렀지만, 마무리가 덜 된 상태로 흙과 나무들이 뒤섞인 채 동산을 이루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인간의 이기심이다. 20년 넘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나무조차 천덕꾸러기로 만든다. 한 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이 좋아 그 밑에 둘러앉아 간식도 먹고, 더위를 식혔는데 이제는 그런 즐거움은 누리지 못하리라.

어둠이 내리며 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붕을 두드리더니 이내 집과 마당과 뒤뜰을 흠뻑 적셨다.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 하늘을 가른다. 나무는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 소중한 생명을 마구 훼손하는 인간들의 행위를 질책하려는 듯 했다. 자연 또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릴 수도 있는데 참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둥소리가 귀를 울리고 심장까지 흔들었다.



죄책감이 들어 커튼을 살짝 들추고 내다보는데 뭔가 달라졌다. 땅에 쓰러지고 엉킨 나무의 무리가 어깨를 펴고 몸을 키운 듯하다. 몸을 반쯤 구부리고 단단하게 무릎을 굽힌 짐승 같았다. 아니 인디언들이 나무의 정령은 키 큰 사람이라더니 그런지도 모른다. 돌풍을 막아 집을 지켜 주려나. 비가 그치면 토막토막 잘려나갈 그들이다. 그런데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지 나무는 침묵으로 제 몸을 보여준다.

시누이는 가지와 기둥은 말렸다가 겨울에 벽난로 땔감으로 쓰자고 한다. 굴착기 기사는 밑동을 가져다 거실의 티 테이블로 만들 것이니 남 주지 말라고 미리 부탁했다. 나도 나무토막 하나를 갖고 싶다. 옹이가 많이 맺힌 부분이라면 더 좋겠다. 나무가 성장하면서 가지가 나온 자리가 옹이다. 예로부터 옹이가 많으면 단단해서 나무가 갈라지는 현상을 멈추게 하기에 집의 대들보나 기둥으로 쓰였다.

충격이나 변화에도 꿋꿋하게 자신을 지키는 나무의 아픈 생채기인 옹이는 단단하고 향이 깊다고 한다. 컴퓨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예측 없이 찾아드는 삶의 고비 때마다 만져 보리라. 세상 모든 것들은 상처 하나쯤 갖고 있다고, 이겨내면 깊은 삶의 이야기를 품을 수 있다는 위안을 나에게 줄 것이다. 풀리지 않은 글을 붙잡고 씨름하다 잠시 베개 삼아 머리를 대면 나무의 지나온 시간을 속삭여 주지 않을까.

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며 가지로는 하늘의 정기를, 뿌리를 내려 대지의 숨결을 빨아들이다가 온몸 구석구석을 아낌없이 내어 준다. 어느 곳에서 어떤 형태로 변하든 나무는 자신의 몫 이상으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마치 소가 가죽부터 뼈까지 인간을 위해 다 내놓는 것과 같다. 그렇다, 나무는 소다. 푸른 소다.

나무처럼 살 수는 없을까. 세상을 묵묵히 관조하며, 부는 바람맞아 꺾이지 않게 흔들려 주되 확고하게 서 있는 모습을 닮고 싶다. 사계절에 순응하며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나 자신의 영역을 넓혀 보고도 싶다. 새싹 키우고 꽃 피고 열매 맺어 주위를 풍성하게 만들었으면 한다.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창밖의 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다. 나는 비가 멈추지 않기를 바라며 쓰러진 나무를 내다본다.


이현숙 / 수필가·재미수필문학가 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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