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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내 몰래 하는 명상

“주중 아내가 출근하면
내 삼매도량인 뒷마당에서
명상으로 든다.
아내가 집에 있는 주말이면
동쪽 담 구석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로 숨어든다”

아내와 다툴 때마다 아내가 사용하는 단골 무기가 있다. 내겐 희미하지만 내 과거 잘못 들추기다. 내게 죄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마치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원죄라는 죄의식을 심어주듯이…. 그러던 아내가 최근에는 색다른 ‘태클’무기를 들이댔다.

“그렇게 화를 내는 사람이 명상은 왜 해!”

어럽쇼, 명상을 한다면서 웬일로 대드느냐는 의미일까? 깨달음을 얻고 구원 받는 것이 내 삶의 궁극 목표고, 그래서 명상을 하고 있지만 아직 그 근처에도 못 가본 내게 아내는 턱도 없는 무리한 바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전문직을 가진 아내는 나보다 돈을 많이 번다. 조그만 광고 사업을 하면서 집에 가져다주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한 액수는 내 최대 가능성이었다. 약속한 날짜와 액수를 지키려 방방 뛰지만 늘 힘들었고 스트레스였다.



아내는 정원 가꾸기나 집수리 등은 물론이고 수입 지출의 재정, 하다못해 자식 교육까지도 나를 배제한 채, 과부도 아니면서 꼭 과부처럼 혼자서 꿋꿋하게 잘도 해나갔다. 내 구두나 양말, Y셔츠, 양복 등을 미리미리 사다 놓는 바람에 내가 사고 싶은 게 있어도 살 필요가 없었다. 아내는 나를 양육(?)하듯 바라지를 해왔고 대신 집안에서 내 무력감은 커갔다.

그렇게 비밀처럼 흘러간 세월이 이제 서쪽 바다의 끝에 노을로 피어날 때 쯤 나는 집에, 은퇴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가 있지만 이제 노래와는 거꾸로 나보다 일곱 살 젊은 아내는 아직도 쌩쌩하게 항구를 들고나는 배였고 나는 항구 같았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 만남과 이별이 늘 뒤섞이는 항구와 배 같은 눈물이나 사랑의 애절함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붙박이 항구가 어찌 배처럼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떠나지 못하는 항구는 드넓은 바다가 점점 그리워지고 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내 스스로가 궁금해서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 모르는 스스로가 자신에게 누구냐고 묻다니…. 어찌 답이 나오겠는가. 소크라테스도 끝내 못 찾았던 것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답을 찾아낸 여럿의 성인 성자들이 있지만 그분들 중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는 어려운 숙제를 준 분도, 생겨난 것은 사라지고 세상 만물은 모두 공空한 것이라는 심오한 가르침을 남긴 분도 가버렸다. 나는 그 두 분이 남긴 숙제와 가르침을 공부하며 열심히 수행, 따르려고 애쓰고 있다. 언젠가 나도 답 찾고 성자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랴.

내 명상의 편력은 참 ‘나’를 찾고자 시작되었다. 명상은 깊은 내면에서 신성神性이나 불성佛性을 향해 피어나려는 고요와 안정의 꽃이다. 만일 내가 고요와 안정의 상태라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게 있겠는가. 억만장자나 세상을 호령하는 권세가 추구하는 것이 이거 아닌가? 붓다나 예수 같은 위대한 성자들이 우리들에게 내면으로 들어가라, 탕아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던 이유 아닌가.

나는 느리고 깊은 들숨과 날숨을 한 호흡씩 알아차리면서 내면으로 든다. 들판의 야생마처럼 거칠게 날뛰던 마음들은 무중력 상태에서 힘을 잃고 유영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져도 답은 늘 ‘몰라’다. 내 이름이 뭐지? 나이는? 하고 물어도 답은 몰라다. 궁극엔 대답할 자도 없고 물은 자도 없다. 호흡도, 손, 발의 위치와 느낌, 감각도 없다. 점 하나로도 남지 않는, 나도 너도 없고 보는 주체도, 보이는 대상도 없는 무주공처에서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아無我지경이다. 마음을 초월해 과거도 미래도 없고 시간과 공간도 없다. 미움도 원망도, 죄, 죄의식도, 성경도, 불경도 종교도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와중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인다.

누구도 나에게 진정 내가 누구인지, 내 참 자아에 대해 말해줄 수 없다. 오로지 스스로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하고 깨달았다 해도 이것을 언어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단다.

나는 아내를 변화시킬 수 없는 걸 아는데도 눈곱만큼이라도 내 생각대로 변화되어주길 늘 기대하며 살고 있다. 가당찮은 기대기 때문에 내게 평화는 오지 않는다. 마음의 평화가 오는 원리는 상대나 세상을 바꾸려들기 보다는 나의 세상 보는 눈과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명상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주인들의 경험담을 들으면 우주에서 태양은 내가 위치를 잡기에 따라 어느 방향에서든 뜨고 지며 좌, 우, 상, 하, 동서남북이 없단다. 이 지구상의 이치라는 것들이 실은, 사람들이 기준을 정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안 만들고 정하지 않으면 이치도 의미도 없고, 그냥 아무 것도 아니다. 세상만물은 모두 인간들이 부여한 의미들로 꽉 차지 않았는가?

주중 아내가 출근하면 나의 삼매도량인 뒷마당에서 명상으로 든다. 그러나 아내가 집에 있는 주말이면 동쪽 담 구석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로 숨어든다. 나는 아내가 어떤 불평을 해도 묵묵히 입 다문 성자이길 바라는 아내를 충족시킬 자신이 없어서다. 그러나 내가 내면에 들면 거기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아내는 알까?

나는 아내를 버린다. 아내와 세상과 내 과거, 미래를 미련 없이 버린다. 생각을 놓을 때라야, 내 마음이 가난해지고 마음이 공할 때 나는 평화다. 아내가 명상 중에 나타나면 나는 '당신 누구시더라?’ 시치미를 떼고 몰라, 모른 척 한다. 그러나 그렇게 초월한 그 너머에는 분리 없이 하나로 가득한 충만이 있다.

그러나 명상에서 현실의 오프라인으로 돌아오면 나는 아직도 힘들다.


김윤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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