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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일상의 풀 먹이기

“갈수록 세대 간의
차이가 벌어져
부모와 자식 간에도
추억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어렵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을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일인데 올여름 유난히 길었던 무더운 날씨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이불 홑청에 풀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25년 가까이 그 일을 하지 않았다. 몇 나라를 거쳐 미국에 정착한 뒤엔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토요일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방마다 이불 홑청을 걷어냈다. 세탁하기 전 풀을 먹여야 할 면 종류를 구분하여 세탁기에 돌리는 동안 밀가루를 연하게 풀어 타지 않게 끓여 놓았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는 밀가루나 쌀가루를 사용하거나 밥알을 보자기에 싸서 곱게 주물러 풀물로 쓰기도 했다.

이불 홑청에 풀을 먹이지 않게 된 것은 침구 문화의 탓이기도 하다. 한동안 실크나 새틴, 폴리에스틸 같은 천을 많이 사용했지만 요즈음 건강에 좋고 감촉도 좋아선지 면 종류나 극세사 같은 부드러운 커버를 사용한다. 이불솜으로 묵직한 목화솜 대신 무게감마저 느낄 수 없는 가볍고 따듯한 양모나 오리털을 애용한다. 집에서 빨래를 할 수 있는 것을 재외하고는 대개 2, 3년에 한 번 드라이클리닝을 해주게 된다. 양모는 동물성 단백질로 주변 습기를 흡수해 지방이 변해서 악취가 날 수 있으니 자주 건조해 주기만 하면 옛날 이부자리 관리보다 한결 쉬워졌다.

깨끗이 빨아진 홑청을 준비해 둔 풀물에 잘 주물러 햇볕에 말리는 대신 드라이기에 넣고 반쯤 말렸다. 완전히 마르기 전에 꺼내 반듯하게 접은 후 다듬이질 대신 천으로 싸서 발로 밟아 큰 주름이 펴지게 했다. 습기가 남아 있는 홑청을 햇볕에 살짝 말려 다리미로 다렸다. 시중에서 파는 스프레이 풀을 사용할 때보다 훨씬 매끄럽게 주름이 잘 펴졌다. 어릴 적 할머니와 어머니가 이불 빨래하는 날은 온종일 집안이 분주했다. 손으로 일일이 실밥을 뜯어서 홑청과 이불솜을 분리한 후 큰솥에 양잿물을 넣고 삶았다. 풀을 먹여서 대충 말린 후 두 사람이 마주 잡고 땅겨서 형태를 잡은 후 다듬잇돌에 알맞은 직사각형의 크기로 접어 다듬질한다.



두 분이 마주 앉아 다듬이 방망이질할 때, 마치 이중주의 타악기를 연주하듯 강약의 리듬을 반복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여름날 오후 나른한 오수에 젖었을 때 듣는 그 리드미컬한 다듬이 소리는, 아득한 꿈속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 같았다.

다듬이질이 끝난 빨래를 뜨락 가득 빨랫줄에 널어 바람에 살랑거리면 보기만 해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눈이 시리도록 흰빛 끝자락 어디쯤, 끝없는 바다가 닿아있는 듯 흰 돛단배를 연상시켰다.

그때는 여러 세탁 과정이 끝났다 해도 이불솜을 다시 홑청 속에 넣고 꿰매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지금은 지퍼나 단추가 달린 홑청에 안 감을 넣으면 간단하지만, 전에는 홑청 속에 솜을 넣고 네 귀가 잣대로 잰듯 한 땀 한 땀 손으로 꿰매야 했다. 네 귀의 시접이 얼마나 반듯하고 매끄럽게 바느질을 하느냐에 따라 모양과 솜씨의 척도가 달라진다. 어릴 적 어머니가 이불을 꿰맬 때면 반대쪽에 앉아 긴바늘을 들고 어머니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이불 귀퉁이의 사각에서 딱 떨어지게 시접을 접어 넣는 일은 생각보다 싶지 않다.

온종일 걸리는 작업의 삼 분의 일을 기계가 했음에도 어머니 세대들이 평생 했을 이 일상의 일들이 쉽지 않게 느껴짐은 그동안 너무 편한 것에 길들여 있었음이리라.

풀 먹인 이불은 겨울보다 여름이 제격이다. 열기가 가시지 않은 여름밤 잘 손질된 이불 속에 누우면 가슬가슬한 느낌이 피부에 닿아 차갑고 시원한 감촉으로 새 이불을 덮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움직일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는 내 유년의 기억 속에 아직도 남아있다.

이제 이런 감촉과 느낌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 아이들도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을까. 갈수록 세대 간의 차이가 벌어져 서로가 바쁘고 시간이 엇갈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추억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사람들은 기분 좋은 소리와 냄새, 촉감을 가장 오랫동안 기억한다. 이제 각각의 제 가정을 가지게 될 내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했던 시간에 어떤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방마다 주름살 없는 정갈한 이불을 침대 위에 반듯하게 깔아 놓으니 무슨 큰일을 한 것처럼 흐뭇하다. 일생의 삼분의 일을 잠자리에서 보낸다. 이부자리에 늘 신경을 쓰셨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잠 못 이루는 무더운 여름밤. 풀 먹인 상큼한 이불을 펴고 일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 한 자락, 아련한 꿈 속에서나 이루어볼까.


박신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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