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Los Angeles

70.0°

2020.10.23(Fri)

[수필] 인연과 우연

박신아 / 수필가
박신아 / 수필가
  • 글꼴 확대하기
  • 글꼴 축소하기

[LA중앙일보] 발행 2020/09/18 미주판 17면 기사입력 2020/09/17 18:27

"친정에 남은 내 물건을
40년 넘게 간직하고
계신 어머니는 아마도
그 낡은 노트장을
아직도 딸을 보듯이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우연히 이선희의 ‘인연’이란 노래를 듣는다. 감미롭고 청아한 선율이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거부할 수가 없는 것. 우리에게 주는 선물, 이것이 인연이고 운명이란다. 불조(佛祖) 성현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지 못했던 인연에 대해 한동안 생각한다.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나 노래 가사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인연에 대한 고찰이 많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 가운데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는 것은 기적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예측하지 않아도 어느 날 예고 없이 슬며시 다가와 내 삶에 일부가 되어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부모 형제와의 인연, 부부간의 인연, 먼 타국에 나와서도 내 나라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같은 언어를 쓰며 어울려 사는 것도 인연이다.

그중에서도 평생을 함께해야 할 천생연분인 부부의 인연이 아닐까. 천 번의 생을 돌고 돌아 만날 수 있다는 귀한 인연인데도 살다 보면 그 인연의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누군가를 만나 우정을 나누기도 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슬며시 멀어지기도 한다. 되돌아보면 진정으로 오랜 시간 마음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하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갈 때 지속될 일이다.

필연은 우연의 모습으로 만나 인연이 된다. 언제 보아도 좋은 사람, 늘 변함없는 사람을 만나는 행운은 귀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연은 전생에 좋은 업을 쌓았을 때 가능하다고 한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악연도 있다. 흉한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전생의 업보라고 한다. 모든 만남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일 것이다. 살면 기적이 아닌 것이 이뿐이랴.

아이들이 자라 수많은 사람 가운데 짝을 만난 것도, 혼인하여 외손녀가 태어나 우리에게 기쁨을 준 것도,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제 아빠의 성을 달고 특별히 우리에게 와준 쌍둥이 손자도 인연이며 기적이다. 어쩌면 미리 운명적으로 맺어진 필연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 물건과의 관계에도 인연이 있다. 내게 가장 오래된 인연으로 지금까지 함께한 물건도 있다. 첫아들이 돌을 맞아 남편의 친구 부부로부터 받은 독일제 반죽 믹서기와 한 세트로 된 플라스틱 보울이다. 빵을 만들 때 손쉽게 반죽을 하기도 하고 달걀을 풀어 빵 위에 올리는 크림을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이 자랄 때는 무던히도 많이 사용했는데 한동안 사용할 일이 없어졌다.

42년을 같이하며 바다 건너까지 함께 왔는데 얼마 전 그만 바닥에 금이 가고 말았다. 무엇을 넣고 빻았던 것이다. 오래되었어도 처음처럼 은근한 오렌지색이 변하지 않았고 가장자리가 밖으로 휘어져 손잡이로 쓸 수 있어 편리하다. 큰 재물도 아니고 비싼 크리스털이나 골동품도 아닌 한낱 플라스틱 그릇을, 며느리에게 물려주며 옛 추억을 말해 주리라 했는데 아쉬웠다.

지난해에는 한국에 계신 구순의 어머니께서 LA까지 가지고 오신 오래된 노트 한 권도 그중에 하나다. 친정에 남아 있는 유일한 내 물건이었는지 모른다. 40년이 넘게 그걸 간직하고 계신 어머니는 아마도 그 낡은 노트 장을 딸을 보듯이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다. 90세가 넘고 나서 이제는 그것마저도 주인에게 돌려주려는 듯 자주 주위를 정리하신다. 긴 세월을 말해 주듯 종잇장은 누렇게 변해있고 얇아졌다.

20대에 시골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한 반의 인원이 80명이 넘었다. 나름대로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 일을 좋아했다. 여름방학이 되기 전 장마가 시작되면 교실 안은 온통 비릿한 땀 냄새와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주위는 갑자기 적막감이 흐른다. 썰물이 밀려 나간 텅 빈 바다처럼 빈 교실에서 잡무를 끝내고 혼자 남아 그때 쓴 일기장 겸 시작 노트다. 첫 장을 열자 치기 어린 감상에 젖어 써놓은 글들이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물건들을 다시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그 또한 끈질긴 인연이 아닌가 싶다.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만남이라도 그 인연을 늘 보석처럼 소중히 가꾸지 않으면 깨어지고 마는 것이 인연이리라.

오늘의 핫이슈

PlusNews

포토 뉴스

전문가 칼럼전문가 전체보기

HelloKT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