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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남편의 훈장

“그 훈장을 없애느냐
가보로 남기느냐 하는
문제는 훗날 아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3년 전
이사 올 때 가져왔었다”

동부의 대학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그곳에서 살던 딸이 15년만에 캘리포니아로 이사 왔다. 지인들은 내가 로토를 맞았다며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사위의 직장이 있는 H시 가까이로 집을 옮기며 또 한 번 버리느냐 마느냐 선택의 한 가운데에 놓이게 된 액자가 있다.

가로 15인치, 세로 20인치의 액자의 위쪽에 남편의 이름이 양각으로 새겨있고 아래쪽에 현란하게 수놓인 무궁화 꽃잎 사이로 시상자인 그 당시 대통령의 이름이 아른아른 보인다. 대한민국에 큰 선물을 안긴 공로로 남편이 받은 훈장이다. 그 훈장을 없애느냐 가보로 남기느냐 하는 문제는 훗날 아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3년 전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할 때 짐 속에 넣어 왔었다. 이번에 또 집을 옮기며 문득 깨달았다. 이미 레테 강을 건넌 남편도 잊어버렸을 그 훈장을 내가 너무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떠나보내자. 액자만 버릴 수 없어 폐기처분할 짐 속에 함께 넣어서 가만히 문밖에 내놓았다.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며 머리에 떠오른 이름이 노벨상을 박차버린 사르트르였다,

몇 해 전, 파리 여행의 마지막 날 생 제르망 데프레 거리에 갔다. 카페 드 플로로와 카페 뒤 마고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드골 공항을 출발할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두 카페 다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친구들은 조금 더 귀에 익은 카페 뒤 마고로 가고 나는 혼자 카페 드 플로로로 갔다.



파리의 카페들이 대부분 밖에 있는 노천 의자는 종업원들이 안내를 해 줘야 차지할 수 있지만, 실내의 자리는 많이 붐비는 시간이 아니면 슬그머니 가 앉을 수 있다. 이층에 사르트르가 앉아서 글을 쓴 의자가 있었다. 소란한 카페 아래층과는 달리 오후의 햇살이 나른한 이층엔 오래된 에디트 피아프가 흐르고 있었다. 사방 벽면은 온통 그의 사진과 글들이 실린 누렇게 변색한 신문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나는 사르트르의 삶과 사랑과 문학에의 열정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파리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거기 앉아서 그렇게 보냈다.

‘인생이란 버스(birth)와 데스(death) 사이의 초이스(choice)’라고 했던 사르트르에게 일생의 가장 극적인 ‘초이스’는 바로 노벨문학상을 거절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964년 노벨상위원회는 그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를 선정했고 사르트르는 수상을 거절했다. 그보다 7년 전인 1957년에 사르트르보다 8년 연하인 알베르 카뮈가 이 상을 먼저 받았던 데 대한 분풀이라는 오해도 받았지만 사르트르는 이 상을 거절함으로써 수상보다 더욱 빛나는 명예를 얻었다.

5.16 문학상을 거절한 시인 유치환은 지금은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엄정하던 군사정권 시절에 이 상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상 받을 사람에게 먼저 물어보고 수상자를 발표하라.”

기라성 같은 작가와 시성들을 거느린 영미와 프랑스에도 문학상은 콩쿠르를 위시해 서넛 정도로 알고 있는데 정작 한국에는 문학상이 프랑스의 치즈 가짓수만큼 많다. 상이 이처럼 많은 까닭은 사람들이 상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리라.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늘어난 상들은 상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가치를 떨어뜨린다. 필경 상(賞)행위는 상(商)행위로 변질한다. 몇 년 전에 수필집을 내고 수상행렬에 줄 섰다가 상행위의 민낯을 보았다. 소문이 나자 주위에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상을 구매하기 위한 동전 꾸러미 소리도 요란하게 시상자의 주위를 맴돌았다.

순수한 상행위는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을 격려하고 그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당연히 수상자가 갑이고 시상자는 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상은 심사위원들에게 터무니없는 권위 의식을 갖게 한다. 그들은 스스로 갑이 되어 단상에 높이 앉아 단하에 펼쳐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을 원하는 행렬을 즐기며 차츰 상(傷)해 간다. 수상경력이 거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문인도 있고 상을 베풀 위치에 있는 원로가 상을 차지하는 경우를 보면 씁쓸하다.

남편의 훈장 아래쪽에 있던 그 시상자를 생각했다. 임기 중의 그의 공과의 비중이 정권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는 다른 분의 이름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남편의 훈장은 한 번쯤 더 내 거실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깼다. 문 앞에 놔둔 꾸러미가 생각났다. 이번엔 정말 버려야 한다. 벌떡 일어나 집어 들고 쓰레기장으로 갔다.

모두 잠든 시간이다. 번쩍 들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쿵, 하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내 가슴에서도 쿠웅하는 비명이 들렸다.


박유니스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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