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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보다 먼저 ‘미국 친구’ 찾아 은혜 갚았다

영문 자전 화보집 펴낸 ‘한미문화협회’ 김원보 회장

코로나 확산하기 몇 달 전인 2019년 말 사하라 사막을 여행하는 김원보 회장 부부. 영문판 자전 화보집 ‘마이웨이 II’ 표지 사진으로도 활용했다. [한미문화협회 제공]

코로나 확산하기 몇 달 전인 2019년 말 사하라 사막을 여행하는 김원보 회장 부부. 영문판 자전 화보집 ‘마이웨이 II’ 표지 사진으로도 활용했다. [한미문화협회 제공]

카마리요에서 열린 제10회 입양아 행사. 많게는 1000명까지 모이는 행사를 열면서 김원보 회장은 ‘한인 입양아의 대부’라는 별명을 얻는다. [한미문화협회 제공]

카마리요에서 열린 제10회 입양아 행사. 많게는 1000명까지 모이는 행사를 열면서 김원보 회장은 ‘한인 입양아의 대부’라는 별명을 얻는다. [한미문화협회 제공]

최초 입양인 모임 이끌고
6·25 참전용사 찾아 위로
김원보 회장은 한국 파송 미국인 은퇴 선교사 위안의 밤 행사도 여러차례 개최했다. 32년간 한국에서 활동했던 메리 멜로즈 선교사(오른쪽)와 함께한 김 회장과 부인 킴벌리 김 여사. 멜로즈 선교사는 김회장 부부가 전달한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한미문화협회 제공]

김원보 회장은 한국 파송 미국인 은퇴 선교사 위안의 밤 행사도 여러차례 개최했다. 32년간 한국에서 활동했던 메리 멜로즈 선교사(오른쪽)와 함께한 김 회장과 부인 킴벌리 김 여사. 멜로즈 선교사는 김회장 부부가 전달한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한미문화협회 제공]

한미 우호 증진에 한평생
최고령 사하라 사막 여행도


김원보 한미문화협회 회장은 1965년 미국에 왔다. 올해로 미국생활 55년째다. 한인사회의 올드타이머인 김 회장은 오랜 이민생활을 회고하는 자전 화보집 ‘마이웨이’를 2017년에 발간했다. 그리고 이달 영문판 ‘마이웨이Ⅱ’를 펴냈다. “마이웨이를 발간한 뒤로 한글이 서툰 가족은 물론 그동안 한미문화협회를 통해 연을 맺은 주류사회 지인들의 요청이 있었다”는 것이 영문판을 낸 계기였다.

영문판 요청과 발간은 김 회장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잘 설명해준다. 투자로 아메리카 드림을 이룬 이후 김 회장의 삶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관계에 있었다. 한인들은 기본적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과 미국 사이에 있지만 김 회장은 그 사이에서 봉사했고 영문판 요청은 오랜 봉사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김 회장은 옆집에 살던 한인 입양아를 만나면서 한미문화협회를 발족하게 됐다. 그때만 해도 다섯 살 입양아가 한국 문화나 음식을 접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번득 생각이 스쳤다. ‘입양아 모임을 만들자!’ 알고 보니 김 회장이 살던 벤투라 카운티카마리요에만 1000여 명의 입양아가 있었다. 부인 킴벌리 여사, 딸 줄리, 아들 스티브와 함께 초청 편지를 보내고 참석 확인 전화를 받았다. 모임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한미문화협회도 만들었다.



1983년 10월 3일 카마리요 커뮤니티 센터. 미국에서 개인이 조직한 첫 입양인 모임이 열리던 날, 비가 쏟아졌다. “그 비를 뚫고 600명 넘게 몰려왔어요. 참석하겠다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안 빠졌어요.”

부채춤과 장구춤, 사물놀이, 가야금 연주, 태권도 시범이 이어졌고 한국 음식을 함께 먹었다. 혼자가 아님을 확인해서일까, 아이들은 금세 친해졌고 부모들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입양인 잔치는 매년 열렸고 1000명이 넘게 모이기도 했다. 자연스레 ‘입양인의 대부’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동부에서 집 나간 입양인을 찾아달라는 전화가 오기도 했고 신기하게도 결국 찾았다. 나중에는 중국과 베트남 입양아들도 초청했다.

소문이 나고 누군가 “6·25 참전용사 모임은 안 하나요?” 묻길래 ‘한국전 참전용사 위안의 밤’을 시작했다. LA와 벤추라, 샌디에이고 재향군인회 지부를 찾아가 명단을 확보했고 한인 신문에 광고도 냈다.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리커스토어에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단골 한두 명은 있게 마련이거든요.” 발품과 정성 덕분에 첫 모임에 500여 명이 왔다. 당시 재향군인회 LA 지부에는 한국전 참전 용사 명부 자체가 없었는데 김 회장이 만든 행사를 계기로 ‘한국전 참전용사협회’가 만들어졌다.

어느 날 또 누군가 물었다. “한국에 갔던 선교사들 모임은 안 하나요?” 그 질문 하나에 ‘미국인 은퇴 선교사 위안의 밤’ 행사가 생겼다. 첫 모임에 선교사 200여 명이 왔다.

이웃집 입양아와 만남이 30년 가까이 봉사하고 감사하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한국과 연결된 사람들, 그러니까 한국 아이를 입양한 사람들과 군인, 선교사가 다른 사람이 아니더군요. 입양아 모임에 온 양부모 중에 한국전 참전군인이 있고 참전군인 중에 한국 선교사가 있었어요.”

김 회장은 몇백 명씩 참석하는 입양아와 참전용사, 선교사 모임을 사비를 들여 수십 년 계속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한국 정부는 한국전 참전 용사와 평화봉사단에 감사의 선물로 방역 키트를 선물해 화제가 됐다. 김 회장은 이 일을 수십 년 전부터 혼자 해왔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입양인은 아픈 과거여서 겉으로는 못 본 듯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김 회장은 이들에게 뿌리를 알리고 문화적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나중에는 친부모를 찾아주는 사업까지 펼쳤다. 옥스나드 시의회 공로패와 재미한인기독교여성협의회의밀알상, 한국 정부의 대통령표창과 대한국민 포장은 그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입양인 가정에 보내는 초청 편지를 함께 썼던 딸 줄리와 아들 스티브는 안과의사와 LA통합교육구 커리큘럼 담당이 됐다. 김 회장 부부는 지난해 두 자녀와 손주까지 온 가족이 한국과 중국을 여행했다. 이 모든 평온한 행복을 김 회장은 봉사의 대가로 여긴다.

스스로 상을 주듯 김 회장은 여행에 푹 빠졌다. 부부가 오대양7대 주를 누볐다고 표현할 만큼 안 가본 곳이 없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을 여행할 때마다 새로운 곳에서는 새로운 눈이 열렸고 돌아오면 삶의 활력이 돋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어지간히 채웠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은 갈증이 하나 있었다. 모로코와 사하라 사막 여행이었다. 지난해 말 김 회장은 드디어 80대 나이에 부인과 함께 보름 간 사하라 사막을 여행했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고 텐트를 치고 이틀간 사막 생활도 했다. “가이드가 그래요. 사하라 사막 여행자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부부라고요. 그래도 가장 씩씩하게 다닌다고.”

마지막 꿈의 여행지 사하라를 다녀온 뒤 몇 달 뒤 코로나19가 발생했고 세상의 문이 닫혔다. 이것도 아마 오랜 봉사 활동이 만든 행운일 것이다.


안유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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