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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이 미국서 말로 미국인을 웃긴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시사적 식견 있어야 가능

어눌한 말투 속에
재치ㆍ해학 번뜻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 출연한 젊은 날의 자니 윤이 스탠딩 코미디를 선보이고 있다.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 출연한 젊은 날의 자니 윤이 스탠딩 코미디를 선보이고 있다.

자니 윤이 한국 TV 대담프로그램에서 지난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니 윤이 한국 TV 대담프로그램에서 지난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89-1990년 한국에서 '자니윤 쇼'로 한국 방송 전체에서 최고 MC로 대접받았다.

1959년에 한국에서 방송인으로 데뷔했다. 1962년에 해군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세 개씩이나 하며 공부를 한 끝에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1964년부터는 뉴욕에서 무명 MC 겸 코미디언 생활을 했다. 뉴욕의 '텔 아비브'라는 카페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탠드업 코미디 양식을 개발했다. 자극적인 소재나 욕설, 폭력 등의 천박한 방법을 쓰지 않고, 여유로운 표정과 다소 느린 말투로 동양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하, 성적 풍자, 정치풍자 등을 간결하게 툭툭 던지는 스타일의 코미디를 했다.

1977년 산타모니카 코미디 클럽에서 유명한 코미디쇼인'투나잇 쇼'의 MC 자니 카슨에게 픽업됐고, 아시아인 최초로 '투나잇 쇼'에 출연했다. 제일 처음 출연은 간단하게 스탠딩업 코메디만 하려고 했는데, 다음 출연인 대배우 찰턴 헤스턴이 갑자기 사라져서 대타로 20분 가까이 자니 카슨하고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때 이탈리아 가곡 '오 솔레미오' 불러서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찰턴 헤스턴이 늦게 도착해 앉자 옆에서 "내가 당신이 출연한 벤허를 5번 봤어요"라고 말했다. 헤스턴이 고맙다고 말하자, 자니 윤은 "5번 본 건 그 영화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때 영어 대사를 못 알아들어서"라고 조크해 모두를 웃겼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잘 대처한 자니 윤을 자니 카슨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자니 카슨은 피디에게 한 달에 한번씩은 자니 윤을 초청하라고 지시했다.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자니 카슨 쇼에 총 34번을 출연했다고 한다. 그 당시 투나잇 쇼의 1회당 출연료는 2만 5000달러였다고 한다. 한때는 NBC 방송국과 전속계약을 하며 '자니 윤 스페셜 쇼'를 진행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백인들은 함부로 못 건드리는 인종차별, 성차별 문제 같은 것을 동양계 이민자로서 '난 그런 거 잘 모르지만' 식으로 시치미 뚝 떼고 툭 건드렸다가 얼른 빠지는 식으로 블랙 코미디를 구사했다. 유창한 영어실력과 상당한 시사적 식견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다. 그 당시 카지노 호텔 공연으로 주급으로 2만 5000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월급으로는 10만 달러인 셈. 1989년에 한국에 귀국해 조영남을 보조 MC로 두고 자신이 메인 MC가 된 '자니윤 쇼'를 진행하여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백밴드가 송골매일 정도였다. 그 무렵 나이가 이미 50대 중반이었다. 쇼 형식은 '자니 카슨 쇼' '데이비드 레터맨 쇼' 형식을 그대로 들여온 토크쇼로, 진행자의 이름을 내걸고 매회 게스트를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본격적인 토크쇼라고 보면 된다.

점잖게 덕담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확 의표를 찌르며 웃음을 자아내는 식의 재치와 해학으로 승부하는 '자니윤 쇼'는 국민 대부분이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특유의 야한 농담 또한 인기 비결이었다. 점잖은 신사 아저씨가 어눌한 말투로 툭툭 던지는 야한 농담은 88올림픽과 독재 시대를 끝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속된 말로 먹혀들었다. 그런 말에 당황하는 출연진의 모습은 이 쇼의 재미있는 조미료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시청자들이 불편하다는 항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특히 높으신 분들을 건드리는 유머를 하면 족족 편집되는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니 윤이 불만을 가지면서 쇼는 방송 1년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자니 윤이 미국에서 성과 정치 등의 민감한 주제를 자유롭게 건드리며 입을 털어도 무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사실 그가 소수계 비주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어느덧 기득권자가 돼버린 그가 그런 얘기를 할 경우 시청자들이 이를 불편하게 받아들였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답답함이 느껴졌을 법도 했다.

SBS개국과 함께 '자니윤 이야기 쇼'라는 이름만 다르고 나머지는 다 똑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MC중 최고 연봉으로 계약하며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과 똑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하면서 결국 얼마 못가 다시 쇼를 그만뒀다. 자니윤 쇼는 이후 주병진 쇼, 이홍렬 쇼, 서세원 쇼, 야한밤에, 놀러와, 야심만만, 힐링캠프 등 오락성 심야 토크쇼의 모태가 됐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1999년 예순넷의 나이로 18세 연하의 한인 여성과 결혼했으나, 2010년에 이혼하였다. 2014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에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적절하지 못한 인사였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2016년 4월 13일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요양원에서 치매 증상을 보였다. 치매 상태에서도 자니 카슨 쇼와 자신의 쇼 게스트 중 일부는 기억했다고 한다.

자니 윤은 2020년 3월 8일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가 '자니'라는 애칭을 사용한 것은 미국에 건너갔는데 본명인 '종승'이 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였기 때문에 이름의 첫 글자인 '종'과 발음이 비슷하고 미국인이 발음하기 쉬운 존(John)을 미국식 이름으로 썼고 John의 애칭형인 자니를 사용하게 되면서 자니 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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