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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삶] 깃들다

신발 벗어 놓고 꽃 속으로 들어간 분홍 매화/ 신발 벗어 놓고 열매 속으로 들어간 살구 분홍/ 신발 벗어 놓고 겨울 속으로 들어간 첫 서리의 분홍/ 신발장을 정리하며/ 지워지지 않는 분홍의 핏자국들을 만진다/ 나는 그 얼룩들의 술래였다

-장석남 시인의 '술래1' 전문



싸락눈 내리자 쥐똥나무 무릎 아래 텃새들 깃들어 구구댑니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 내리던 눈발이 몸을 포갠 채 골목 안으로 깃듭니다. 국화차 향이 말린 장미꽃 사이로 스며듭니다. 기억을 소급하던 저녁은 눈발 속으로 숨어듭니다.



요즘 '깃들다'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깃들다'라는 것은 "아늑하게 서려 스며들다"라는 것. 쥐똥나무 아래 깃든 새들의 밤은 따뜻할 겁니다. 골목으로 스며든 눈송이들은 아늑하겠고요. 서로가 서로에게 깃들며 지새는 밤은 어둡지 않고 환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 마음 한 켠에 당신이 넉넉히 깃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나를 나로 빡빡하게 채우지 않고 한 쪽의 어느 부분을 스스럼없이 비워주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당신도 당신의 많은 부분 곁을 내 주었습니다. 내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오랜 세월 외롭지 않고 두려움 모르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신 곁에 깃들 수 있도록 내어준 당신의 한 쪽이 있었음이었습니다. 생이 때로 거칠고 무례했지만 산자락 아래 양지 같던 푸근한 지평, 바람벽 아래로 깃들 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워낸 한 쪽 모퉁이로 깃든 당신은, 처음에는 특별함이 아닌 여럿 중에 하나였을 것인데 시간의 직조를 거쳐 조금씩 스며드는 과정에서 당신은 나에게 나 자신보다 더 특별한 무엇이 되었고 소중한 의미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랑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오묘함입니다.

사랑은 어떤 떨림이나 불꽃임은 분명하지만 떨림이나 불꽃을 담아 오래 지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떨림이나 불꽃이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면 떨림도 스쳐가는 인연에 불과합니다. 상대를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비워낸 자리에서 서로는 본래보다 더 푸르게 자라기도 하니까요.

당신뿐이겠습니까. 친구이거나, 이웃이거나, 국가이거나 폭이 다를지언정 서로 깃들 수 있도록 서로의 한 쪽 모퉁이를 내 주었습니다. 젖은 어깨를 들이밀고 다가가면 금세 말라 뽀송뽀송해지던 옥양목 같은 마음의 자락. 다 채우지 않고 살아도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발 벗어놓은 꽃 속으로 들어간 분홍 매화" 시의 첫 행에서 범상치 않은 분홍을 봅니다. 서로 술래처럼 스며들어 분홍을 이루는 저 색깔은 사랑의 핏자국입니다. 서로 술래처럼 숨어드는 저 사랑으로 분홍은 온전한 분홍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래된 이야기 같은 눈발이 날리는 저녁. 저녁 속으로 깃드는 아침, 아침 곁으로 깃드는 봄의 향기, 향기에 기대 만개를 꿈꾸는 꽃잎, 꽃잎에 숨어드는 나비들….

이야기가 있는 삶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백열등 불빛 아래로 스며들어 수다가 되는 우리들의 삶은 모두 다 긴 이야기입니다. 웃음이었거나 울음이었거나, 다 같이 하나의 서사를 완성해가는 여정입니다.

'깃들다'에서 '깃'은 새의 둥지를 뜻합니다. '깃'은 본래 '집'이란 어원에서부터 나누었는데 옛말 '짓'이 '깃'과 '집'으로 나뉘고 '깃'은 새의 둥지를,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을 의미하게 됐다고 합니다. 새의 둥지이거나 사람의 집이거나 사랑이 깃들어 사는 곳입니다.


조성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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