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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포럼] 유권자 등록 하셨습니까? 투표 하시나요?

1965년 8월 6일 린든 존슨 대통령이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투표권리법에 서명을 하고 있다.

1965년 8월 6일 린든 존슨 대통령이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투표권리법에 서명을 하고 있다.

"한인 들은 돈만 벌려고 하고, 투표력은 거의 바닥이고 존재가 없다(The Korean Vote is Flat and Does not Exist). 한인 커뮤니티에는 별로 기대할 게 없다." (1985년 한 정치인이 한 얘기)

우리를 일깨워준 폭행 사건

1985년 우리를 일깨워준 한 사건이 있다. 차의태씨가 운영하는 퀸즈74가 젝슨하이츠에 있었던 'KoKo' 남성 의류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업주 차씨가 손님과의 물품 교환문제로 언쟁이 오갔다. 손님이 불러 경찰이 출동했다. 그 과정에서 차씨와 경찰과의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 경찰이 일방적으로 차씨에게 수갑을 뒤로 채운 후 경찰차로 연행하는 중 차 안에서 주먹과 경찰봉으로 무차별 폭행을 했다. 차씨는 온몸이 멍이 들었으나 공무집행 방해죄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차씨의 억울한 일을 함께 듣고, 무고한 시민에게 폭행을 한 경찰에 항의하기 위해 110경찰서를 찾아 항의 시위를 했다. 차씨는 변호사에게 사건의뢰를 했고, 우리는 지역 정치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여러 번 전화를 했으나 면담이 이뤄지지 않았다. 얼마 후 면담 자리에서 시의원이 말하길 "지역 주민들이 코리안들은 지역사회에 참여나 공헌은 하지 않고, 돈만 벌려고 하며 손님에게 불친절하다고 불평을 한다"고 했다. 또 "동료 정치인들이 한인 투표력은 거의 바닥이고 존재가 없다고 했다. 한인 커뮤니티에는 별로 기대할 게 없다"고 솔직히 우리에게 말했다. 너무나 부끄럽고 충격이었다. 사실 그 당시 한인들이 시민권을 따는 목적은 한국에 있는 가족 초청이었고, 유권자 등록과 투표를 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것도 원인이었다.

유권자 등록운동 시작되다



그때 플러싱 지역 한인 유권자가 300여 명 정도였고 투표자는 100여 명, 젝슨하이츠와 엘름허스트 지역은 30여 명이 한인 유권자였다.

이런 일로 인해 지역의 뜻있는 분들과 한인 상인들이 함께 모여 "이젠 우리도 뭉쳐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퀸즈중부한인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때 산파 역할을 한 분들은 전성진 초대회장, 윤기윤(내과의) 초대 이사장, 홍승하 이사장, 전병찬 목사, 조준구 청기와 식당 사장, 윤재동 영부동산 대표 등이었다.

1995년부터 시작한 유권자 등록 운동이 지난주 뉴욕초대교회에서까지, 25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이 운동을 시작 하게된 초창기의 동기와 배경은 이렇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는 뉴욕은 한인 이민의 급속한 증가와 더불어 한인들이 운영하는 자영업, 청과.그로서리.세탁.네일.생선.의류.잡화 등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곳곳에서 한인 업주와 관련된 사건도 많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경찰과 시공무원의 과잉단속, 벌금티켓 발부 등 공권력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문제는 시 규정 위반도 있었지만 거의 영어소통과 규정에 대한 이해 부족이 원인이었고, 가끔은 인종차별 때문이었다. 문화 차이로 타민족 주민들과의 갈등도 있었다. 특히 대다수 한인들이 첫 정착지로 선호했던 맨해튼 통근 교통이 편리한 지역, 엘름허스트.잭슨하이츠.우드사이드.서니사이드 등 지역에서 늘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

선관위에 매주 등록지 전달

1995 년 내가 퀸즈중부한인회 6대 회장을 맡게 되었고 윤기윤 내과의가 이사장으로 다시 추대되었다. 우리 커뮤니티의 힘을 키우기 위해 무슨 사업부터 해야 할까 고민 하던 중 마침 윤기윤 박사가 잘 아는 유태인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소수민족이 힘을 키우려면 정치인을 움직여야 하고, 그 정치인을 움직이려면 우리 유태인들처럼 유권자 등록과 선거자금을 모아주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가장 중점적인 첫 사업으로 유권자 등록운동을 하기로 정했다. 그러나 유권자 등록을 시작 하려면 우선 한인사회에 알려야 했다. 이사들과 전직 회장들이 홍보비로 함께 모은 금액이 2000달러였다. 5개 언론사를 방문해 똑같이 400달러를 주며 홍보를 부탁했다. 말도 안 되는 적은 액수였지만 언론사들의 도움으로 상당히 홍보가 되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유권자 등록용지를 받고 간단한 교육을 마친 후, 그 다음주부터 8명의 전직회장과 이사들이3명씩 조를 짜서 매주 일요일 교회를 방문해 유권자 등록을 받고 우편 등록운동도 시작했다. 우편 등록은 시민권자가 전화를 하면 등록 용지를 반송 봉투.우표와 동봉해 보내 주는 것이다.

윤기윤 내과의와 부인 윤차경씨, 전성진.서준교 전 회장, 홍승하씨, 김석주 전 뉴욕한인회장, 임필수씨 등이 수고를 많이 했다. 이사는 아니지만 성당 친구들, 김준수씨, 오유환씨, 글로리아 오 관세사 부부도 함께 봉사해 주었다. 한인회 사무실이 따로 없어 윤 내과 사무실이 유권자 등록 센터 사무실이었다. 또 매주 등록한 용지를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뉴욕시 선거관리위원회를 직접 방문해 접수했다. 일년 내내 매주 혹은 격주로 선관위 사무실을 방문해 20~30여 명의 신규 유권자를 접수했다. 대다수의 선관위 직원들이 우리를 격려하며 눈여겨 보았다. 또 모든 선거안내와 출마 후보자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려 주었다.

활동 첫 해에 3000명 등록

주중에는 등록을 허락 받기 위해 목사님, 신부님을 설득하는 게 가장 큰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퀸즈중부한인회 박윤용 입니다, 목사님, 저희들은 한인들의 힘과 정치력을 높이기 위해 교회를 방문해 유권자 등록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에 목사님 교회에서 등록을 받기 위해 허락을 받으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이렇게 매주 7~8개 교회에 전화를 한 끝에 어렵게 교회가 정해지면 그 주의 가장 큰 일이 해결된 것이다. 이렇게 일년 동안 시민권을 가진 동포들의 참여로 1995~1996년 첫해에 3000명의 신규 유권자를 등록시켰으며 3년간 6500여 명이 등록했다. 한인 커뮤니티 유권자가 급속히 증가하자 선관위을 통해 많은 지역 민주당 정치인뿐만 아니라 공화당 정치인에게까지 소문이 퍼졌다. 선관위 직원들은 공평하게 민주당과 공화당이 대체로 반반 비율로 근무하며, 민주당이 주지사일때는 선관위원장이 민주당 몫으로 뽑히고 유권자 등록 용지도 민주당이 첫 번째로 인쇄되며, 주지사가 공화당일때는 그 반대로 된다. 항상 유권자 등록에 관한 정보와 어느 커뮤니티가 등록을 많이 하고, 투표력이 있는지 모두 선관위 직원들의 입 소문으로 정치인들에게 알려진다.

피 흘리며 쟁취한 투표권

우리가 이렇게 큰 힘 안들이고 쉽게 할 수 있는 이 유권자 등록은 1965년 전까지만 해도 남부 흑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백인들로부터 린치를 당하며 쟁취한 투표권이다. 그때는 흑인들의 유권자 등록을 못하게 하려고 미시시피주는 주법으로 유권자 등록에 ▶2년 동안 세금을(Poll Tax) 내고 ▶문맹(Literacy Test)시험을 보게 했다(서기가 헌법조항을 읽히고 해석하게 했다).

미시시피의 한 흑인 민권 운동가 메드가 에버스(Medgar Evers) 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2차대전 참전군인이었던 그는 고향 미시시피에 돌아와 몇몇 참전군인들과 함께 투표를 하러 갔다. 투표소를 지키는 백인이 흑인 에버스를 보고 "우리는 진짜 미국 시민만 원한다"고 투표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에버스는 "우리는 미국을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또 고향 미시시피를 위해서도 싸웠다. 독일군과 일본군은 우리를 못 죽였는데, 이제 고향 미시시피의 백인들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한탄했다. 그 일을 계기로 에버스는 흑인 민권운동에 나서다 1963년 그의 집 앞에서 결국 백인 분리주의자가 쏜 총에 희생되었다.

1965년 8월 6일,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해 수많은 흑인들의 희생과 투쟁이 열매를 맺어, 마침내 린든 B 존슨 대통령에 의해 투표권리법이 제정됐다. 이 법 서명식에 킹 목사와 흑인 운동가들이 함께 참석했다. 이 법의 요지는 주와 지방정부가 선거 자격을 한정하거나, 투표에 필요한 요건.표준.관행 또는 절차 요구를 금지하는 것이다. 즉, 인종이나 피부색 때문에 미국 시민의 권리로 선거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정하거나, 줄이는 것을 금지한 법이다. 존슨 대통령은 투표권리법 서명식 기념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1달러짜리 지폐 뒷면 피라미드 위에 라틴어로 'ANNUIT CONPTIS' 즉, '주님은 우리의 사업을 좋아하셨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다 좋아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시작하는 일은 주님이 정말로 이해하시고 정말로 좋아하실 것으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법이 제정된 후 몇 개월 만에 25만 명의 흑인 유권자가 등록을 했고, 4년 만에 미국 남부의 유권자가 두 배로 늘었다. 이 법이 제정 되기 전에는 6% 밖에 안 되던 미시시피주의 흑인 투표율이, 법 제정 후 최고 74 %까지 뛰었고, 다른 주 보다 더 많은 흑인 정치인이 선출됐다. 그 후 43년 만에 흑인들의 투표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탄생시켰다. 2008년 대선 흑인 투표율이 60% 였고 오바마의 2012 재선 때는 62%로 최고 투표율이었다.

우리의 아들 딸들이 당선된다

돈만 벌려고 한다는 말을 듣던 우리 한인 커뮤니티도 이제 이민 초창기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투표력도 바닥이 아니다. 퀸즈중부한인회, 한인권익신장위원회, 시민참여센터, 민권센터 등의 꾸준한 노력으로 뉴욕시는 2만5000여 명의 유권자, 뉴욕주에는 4만5000 여 명의 한인 유권자가 있다. 엔디 김 연방하원의원이 당선되고, 론 김 뉴욕주하원의원을 비롯해 뉴저지 타운에도 시장.시의원이 많이 선출되고 있다. 또한 우리 2세들이 미국 주류 각계에서 일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한인 유권자 등록, 그리고 등록한 우리 동포들이 남녀노소 모두 투표장에 나와 한 표, 한 표를 행사 할 때, 미국에서 그리고 세계의 수도인 뉴욕에서 우리 한민족의 정치력이 얼마 후 미국 대통령에, 뉴욕시장에, 국무장관에, 김.박.이.최.정씨 등의 아들 딸들을 당선 시킬 날이 멀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박윤용 / 한인권익신장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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