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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현장에서] 안되면 버티기

마샤 리네한 박사는 변증법적 행동치료(DBT)라는 유명한 심리치료법의 창시자다. 워싱톤대 교수인 그녀는 정신분열 진단을 받고 틴에이져 시절 26개월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가톨릭 신자인 그녀는 퇴원 후에도 20여 년을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 어느 날 신비한 체험을 한다. 작은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던 중, 갑자기 교회 안이 금빛으로 변하면서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자기 방으로 도망쳐 온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한다. I love myself.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그 순간부터 삶이 바뀌었다고 리네한 박사는 말한다.

이후 리네한 박사는 자신의 문제가 조현병이 아니라 경계선(보더라인) 성격장애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우울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 현재 감정을 수용하면서 내면의 감정 폭풍을 처리해나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즉 고통스러운 현실을 가지고 고민하는 대신,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는 낮에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면서 심리학을 공부하여, 자살 충동으로 시달리는 보더라인 성격장애 치료를 위해 변증법적 행동치료를 만들게 되었다.

리네한 박사는 어떤 힘든 문제든, 네 가지 방법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그야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Solve the problem)이다.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해결하면 된다. 그런데 살다 보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훨씬 많다. 그럴 때 둘째 방법으로, 그 문제에 대한 인식과 감정을 바꾸는 것(Try to feel better about it)이 있다. 문제적 현실은 못 바꾸지만, 그 현실에 대한 내 생각을 낙관적이고 수용적으로 바꾸면, 힘든 생각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하지만, 해결도 못 하고 좋게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라면? 셋째 방법으로, 그 현실을 그냥 전적으로 수용(Radically accept it)하라고 한다. 즉 그냥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는 것이다. 위의 세 방법이 다 안될 때도 있다. 그때 마지막 방법이 그냥 힘들게 지내기(Stay miserable)이다. 좀 어이가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힘든 상황과 싸우는 대신 그냥 하루하루 잘 버티다 보면, 상황과 감정이 개선되는 수가 많으니, 이것도 사실 해결방법이라는 것이 리네한 박사의 주장이다.

상담 일 초기에, 아주 예쁘고 똑똑하고 재능 많은 6학년 여자 아이를 상담하게 되었다. 심한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이 아이와, 이 네 가지 문제 해결법을 가지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아이는 약도 먹고 상담도 받지만, 여전히 좋아지지 않으니, 첫 번째 방법인 ‘해결’이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상황에 대해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안 되니, 두 번째 방법인 ‘인식과 감정 변화’도 안된다고. 세 번째 방법인, 문제에 대한 ‘전적 수용’ 또한, 아이는 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그 나이에 자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그래서 마지막 방법으로, 그럼 그냥 ‘비참하게 지내기’도 있다고 했다.



Stay miserable? 아이가 웃었다. 비참하게 지내는 게 무슨 해결 방법이냐면서. 나는, 우울하면 그냥 우울해 해. 울고 싶으면 울고. 중간중간 조금 덜 우울한 날들도 있으니 그래도 다행 아니니. 그러다 보면, 지금 이렇게 바닥을 치게 심한 우울증이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좋아지지 더 나빠지지는 않을 거야. 이렇게 위로 같지 않은 위로, 해결 같지 않은 해결방법을 제시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는 그 후, 그래, 나 지금 우울증 있어, 쏘 왓, 이렇게 받아들이고 가족의 응원 가운데 치료를 꾸준히 잘 받았다. 힘든 시간을 잘 보낸 이 아이는, 6년이 지난 지금 씩씩하게 대학 진학 준비에 한창이다.

요즘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는 팬데믹도 그렇다.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둘째 방법인 팬데믹에 대한 ‘감정과 인식 변화’는 가능할까? 아, 힘들다. 좋은 점이 어디 있겠나. 칼럼을 완성하려고 굳이 찾아보니, 아, 마스크로 인한 미모의 평준화, 이런 거 있다. 모두가 눈 밖에 안 보이는 요즘, 잘 생긴 사람도 못생긴 사람도 없다. 마스크만 하나 척 쓰면 아주 마음이 평온하다. 화장을 안 해도 되는 건 물론이다. 줌 미팅 때는 립스틱만 슥 하면 끝이다. 휴가도 힘들어지고, 공연이나 경기 관람도 모조리 사라진 요즘, 돈이 많거나 적거나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다. 그저 세 끼 먹고 안전하게 지내면 잘 사는 거다. 코로나가 가져온 또 하나의 평준화다.

아이들의 원격 수업, 부모들의 재택근무로 가족이 종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공간이 되어버린 집에서, 갑자기 삼식이로 돌변해버린 온 가족 식사를 해대느라 엄마들의 고생이 말이 아니다. 아침 먹는 시간이 다르고 아이들 점심시간도 다 달라서 종일 부엌에서 산다는 한 엄마에게 말했다. 아침은 뷔페식으로, 점심은 도시락으로 준비해 놓고, 전처럼 낮에 산책도 하고 친구도 만나라고. 그리고 한마디 했다. 요리하느라 힘들다는 것은, 그래도 음식 해줄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다는 것이고, 식재료를 살 돈이 있다는 것이니, 한 번 ‘좋게 생각’ 해보라고. 그게 힘이 들 때는, 이 상황을 걍 팍 ‘수용’ 해버리고 ‘힘든 대로’ 하루하루 버텨보라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전의 자유롭고 훈훈했던 일상이 돌아오지 않겠냐고. 벌써 시월이라고.


김선주/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전 포트리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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