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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뒤돌아보는 징검다리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지금의 일상들도 언젠가 있었던 일의 반복처럼 느낄 때가 많다. 긴 여정동안 좋은 날들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예기치 못한 그 무서운 강물들을 어찌 건너 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돌아보면 꼭 필요한 시간과 장소에 내가 딛고 지나갈 수 있는 듬직한 돌들이 있었다. 그 존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허겁지겁 건너 왔지만 지금은 그 도움들이 누구, 그리고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다. 늦게나마 마음 속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젠 내가 엎드려 그 징검다리가 되어야 할 차례임을 느낀다.

얼마 전 내가 1976년도에 졸업한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다. 40년의 세월도 이렇게 잠깐이었으니 반만 년 역사라고 해도 그저 금방 지나갔으리라. 대학미술관장의 제의로 내가 재학시절에 그렸던 그림들과 최근작들로 전시가 엮어졌다.

오랜만에 대하는 옛날 작품들 앞에서 흥분과 부끄러움이 겹쳤다. 그 작품들은 지금의 내가 다시 그릴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천진함과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제일 예뻤던 날들에 무심하게 그린 그림들이었다. 무엇도, 누구도 두렵지 않았던 날들, 보이는 모든 것과 생각나고 느껴져 오는 모든 것들이 그저 요술처럼 그림으로 흘러나오던 때였다.

그 뒤, 그 어리고 화사한 젊음에서 조금씩 깨어나면서, 생각해야 할 조건들이 늘어나면서, 그렸던 그림들은 그 무심했던 날들에 대한 향수와 천진무구함을 재현하고 싶은 애잔한 몸짓들인 것 같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들은 오랜 세월 내 안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로 남아 계속 흘러나오면서 지금까지 삶을 그려내는 기운이 되고 있다. 다시 돌아갈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그 짧았던 순수의 나날들. 그래도 이 그림들이 나만의 명작으로 남아 그때의 환영을 볼 수 있는 것은 안타까움이자 큰 행운이다.



1970년도 미국엔 소위 색조 추상(color field abstraction)이 유행하던 때였다. 영어를 못했던 나는 회화 수업시간에 선생님이나 다른 학생들이 그리는 걸 유심히 보고 그와 엇비슷한 추상화를 열심히 그렸다. 외국학생 장학금도 계속 받아야 하는 등,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지만 내가 모르는 세계를 접하는 흥분에 나는 큰 캔버스에 더 많은 색깔을 칠하고, 그 위에 모래를 뿌려보고, 모래 위를 물감 묻은 장화로 걸어 다니고…. 온갖 실험을 다했다. 그 열정 덕분이었는지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나의 삶과는 관계없이 헛도는 무언가를 따라가는 듯한 허전한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모차르트 음악회에 가느라 수업에 늦게 된 날, 지각을 핑계로 음악회 도중에 프로그램 주위를 가득 그린 스케치들을 교수님께 보여드렸다. 한참을 보시던 그분은 놀라시면서 "이것들이 너의 예술이 아니냐, 너만의 목소리가 분명한데 남의 것을 하고 있는 건 아니냐"고 물으셨다. 다음날 매일 쓰는 일기 책에 계속 그려온 수 많은 그림들을 다 보여드렸고, 그분은 "이것들이 너만의 작품 세계다" 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돌아보면 그 교수님의 격려가 내게 큰 징검다리 이상의 든든한 주춧돌이 되어, 지금까지 나만의 목소리를 듣는 작품세계를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뉴욕이라는 현대미술의 도도한 파장 속에서도 내가 귀하게 여기는 아름다움과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이미지들을 꾸준히 그려올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충만한 격려 덕분이었다.

바람처럼 빠르게 지나갈 남은 나날들, 내가 누군가에게 이만한 디딤돌이 되어 그만한 기적에 보답할 수 있을지, 그러기엔 시간도 지혜도 부족해서 한 세월이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아쉬움과 고마움뿐이다.


김원숙 / 화가·인디애나 블루밍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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