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커뮤니티 포럼] 미국은 적을 몰랐고 자신을 과장·과신했다

베트남 전쟁 지상 강좌④

1965년 4월 린든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의 해결책으로 베트남의 대대적인 개발을 약속했다. 스스로가 호찌민이 도저히 거절 할 수 없는 매력적 제안이라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노이 호찌민 기념관에 재현해 놓은 그의 거실 겸 집무실 모습. 웅장한 백악관과 비교된다. [사진  이길주 교수]

1965년 4월 린든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의 해결책으로 베트남의 대대적인 개발을 약속했다. 스스로가 호찌민이 도저히 거절 할 수 없는 매력적 제안이라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노이 호찌민 기념관에 재현해 놓은 그의 거실 겸 집무실 모습. 웅장한 백악관과 비교된다. [사진 이길주 교수]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의 가장 기본 되는 가르침이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을 아프게 한 비극이 된 이유는 이 단순한 가르침을 현실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미국은 적을 몰랐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과장, 과신했다. 베트남에서 미국은 위태로웠고 결국 패전의 국치를 경험해야 했다.

존슨 정부의 '정복 없는 평화'

1964년 8월 북베트남(월맹)이 공해상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미 해군함을 이유 없이 공격했다는 주장에 근거해 린든 B 존슨 정부는 베트남에서 사법부의 간섭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백지수표'를 받아냈다. 그 후 미국의 공폭이 본격화됐다. 공폭이 가열됨에 따라 미 군사 시설을 보호할 지상군이 절실해졌다. 1965년 3월, 남베트남 다낭에 해병대를 상륙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전쟁이 된다. 남베트남이 스스로를 돕기 위해 미국은 군사 원조와 지원 병력을 제공할 뿐이라는 오도된 당위성마저 더는 필요 없게 됐다.

새로운 정당성이 필요했다. 1965년 4월 7일. 존슨은 볼티모어 소재 존스 홉킨스 대학을 찾았다. 그는 '정복 없는 평화 (Peace Without Conquest)' 란 연설을 했다. 미국은 무엇이며, 그 정체성과 베트남 전쟁과의 연계성을 체계적 논리와 강력한 언어로 선포했다. 총 300만 명 미국의 젊은이들을 베트남의 전장으로 가게 하는 논리였다. 이들 중 5만8000여 명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정복 없는 평화' 연설에 담긴 베트남 전쟁의 당위성을 필자는 ABCD로 요약한다. Aggression(침략전쟁), Biblical(성서적 언어), Confidence(국가신뢰), 그리고 Development(개발 가능성)를 말한다.

존슨은 베트남 전쟁을 베트남 민족의 독립, 통일 의지와 무관하다고 보았다. 미국이 '베트콩'이라 칭한 남베트남 내의 민족해방전선을 북베트남의 사주를 받은 꼭두각시로 치부했다. 그렇다면, 베트콩을 조종하는 북베트남은 과연 누구의 조정을 받나? 존슨은 자신 있게 중국(중공)을 겨냥했다.

베트남 사태의 배경에는 깊어지는 중국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하노이는 북경의 부추김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중국은 베트남에서뿐 아니라, 한국, 티벳트 인도를 상대로 팽창주의와 침략자의 행동 양식(a wider pattern of aggressive purposes)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팽창성과 침략성을 베트남에서 막지 못하면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그 야욕의 뱃속으로 삼켜질 것이라 했다.

성서적 언어 동원한 전쟁

해결방법은 하나였다. 미국이 나서서 중국, 나아가 전체 공산권의 팽창, 침략 요구를 좌절시켜야 한다. 이때 존슨은 성서적(biblical) 언어를 동원한다. 특히 구약의 언어는 인간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설정한다. 이 가운데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악과 싸워 생명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악의 세력 앞에 무너져 죽음의 길을 갈 것인가란 이분(二分)이 있을 뿐이다. 존슨은 구약의 욥기서 38장 11절을 인용했다.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Hitherto shalt thou come, but no further)." 그 다음의 구절은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공산세력, 특히 존슨에게 있어 아시아 공산혁명의 사령부 격인 베이징을 그는 생명을 휩쓸어 가는 성난 파도로 보았다.

존슨은 마오쩌둥이 유발한 멸망의 역사적 파고(波高)에 편승한 호찌민에게 성서의 언어를 인용해 선택을 요구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명기 30장 19절).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생명과 복의 길을 택할 것을 권유하는 모세의 애절한 절규를 존슨은 호찌민에게 외쳤다.

이런 역사적 결단의 요구는 과대망상의 증거라는 분석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존슨은 호찌민이 잘 못 선택할 경우 파괴와 죽음의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특히 그는 공폭(空爆)을 신의 저주처럼 경고했다. 기도하는 마음속에 자신의 최선의 판단은 가공할 파괴력을 쏟아 붓는 공폭이 평화 보장의 길로 가는 데 꼭 필요한 수단이라고까지 했다. "It is our best and prayerful judgment that they are a necessary part of the surest road to peace."

호찌민에 싸움 포기 제안

어쨌든 존슨은 베트남을 지역 분쟁으로 볼 수 있는 전략적 사고를 갖고 있지 못했다. 베트남은 세계의 자유주의 공동체의 문제였다. 베트남에서 호찌민과 그 뒤에 서 있는 마오쩌둥의 팽창, 침략 의지를 미국이 꺾지 못하면 미국에 대한 국제 사회의 '신뢰(Confidence)'가 깨진다고 보았다. 자유 세계를 보호하고, 인류 공동체에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기본 요소는 미국에 대한 동맹 들의 신뢰였다. 미국의 베트남을 포기하면 공산세력에 맞서고 있는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시작으로 하는 군사 동맹체제는 순식간에 흐트러질 것으로 본 것이다.

이것을 존슨의 신(新) '도미노 이론'이라 부른다. 호찌민이 남베트남을 공산화한 이후, 주변국의 국경을 넘어 공산 혁명을 수출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의 공산화는 지역의 헤게모니 구도를 바꾼다. 따라서, 주변국들이 새로운 현실을 수용, 기존의 친미, 반공 정책에 변화를 줄 것이 자명했다. 일본이 좋은 예이다. 동남아시아 등 자국 밖의 자원과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경우, 중국과 베트남에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아시아에서의 공산세력의 부상은 일본 내에 미국과 일정 간격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등거리 외교의 주장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미국의 군사 기지화된 일본의 이런 변화는 미국의 군사 전략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베트남을 지키지 못하면 친중문(親中門)은 활짝 열릴 수밖에 없는 전략적 구도였다. 존슨은 이런 변화가 도미노 현상처럼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체로 파급될 것으로 봤다.

'정복 없는 평화' 연설의 결론은 미국과 싸움을 포기하면 풍요를 위한 개발(development)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 했다. 존슨은 먼저 미국의 잉여농산물 제공을 약속했다. 밀, 옥수수, 쌀, 목화 등 미국 내 창고에 쌓여 있는 농작물을 풀어서 의식(依食) 문제를 해결하겠노라 했다. 나아가 동남아의 젖줄 메콩강을 대대적으로 개발해 지역 발전에 협력하자고 제안했다.

빈곤 퇴치, 지역 개발, 교육 기회 확장에 정치 생명을 걸어온 존슨답게 그는 호찌민이 전쟁을 중단하면 도래할 세상의 모습을 농촌 전화(rural electrification.農村電化)로 대변했다. 전기가 들어온 뒤 검은 밤하늘이 밝아지고, 집안의 부엌이 따듯해지고, 가정에 온기가 도는 것을 체험했다며 같이 힘을 합쳐 즐거움 없는 밤, 가실 줄 모르는 냉기(the cheerless night and the ceaseless cold의) 세상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 연설을 마치고 백악관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존슨은 자신의 제안에 도취되어 호찌민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을 것 "Old Ho can't turn that down"이라 장담했다. 이때 미국의 베트남전 전사자 수는 400명. 존슨의 매력적인 오퍼에도 불구 베트남 전쟁은 10년 후인 75년까지 계속되고, 전사자 수는 이 숫자의 100배를 초과하게 된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