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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포럼] 연 인원 30만 명 한국군 파병으로 얻은 경의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뉴욕 중앙일보] 발행 2019/06/29 미주판 14면 기사입력 2019/06/28 20:17

베트남 전쟁 지상 강좌⑥

베트남 전쟁 참전국 정상들의 모습. 다른 나라들에 비해 한국은 월등히 많은 수의 병력을 파병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이 고립되고 불안정한 나라가 아니라는 이미지 쇄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박정희 대통령. [사진 린든 B 존슨 라이브러리]

베트남 전쟁 참전국 정상들의 모습. 다른 나라들에 비해 한국은 월등히 많은 수의 병력을 파병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이 고립되고 불안정한 나라가 아니라는 이미지 쇄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박정희 대통령. [사진 린든 B 존슨 라이브러리]

박정희 대한민국 육군 소장이 이끈 5.16 군사 쿠데타 발발 약 1개월 뒤인 6월 13일.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외교 정책 참모들이 모여 한국 사태를 분석했다.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가 트레이드마크인 케네디는 참모진의 보고를 듣고 한국 사태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절망적 상황(a hopeless situation)." 거의 6만 명의 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고, 매년 수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에서 케네디는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5·16 쿠데타와 미국의 폄훼

역사의 시간을 앞당겨 1964년 봄. 존슨 대통령 백악관의 안보 보좌관실은 이제는 쿠데타 지도자가 아닌, 제3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의 현실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엉망진창(a mess)." 우여곡절 끝에 쿠데타 정국이 비교적 안정을 찾고 합법적 정부가 한국에 들어섰지만, 미국의 시점에서는 절망적 상황이 엉망진창으로 변한 것뿐이었다. 이 유명한 독설가는 한국을 냉정하게 의인화(擬人化) 했다. "정신 불안한 미국의 의붓자식(an unstable stepchild)."

5·16으로 정권을 잡은 1961년부터 대한민국이 베트남 전쟁이 파병을 하는 1965년까지 4년 동안 박정희와 한국은 상대를 바보로 만든다는 뜻의 'Put Down'에 시달려야 했다. 그 원인은 통치의 수준에 있지 않았다. 정권의 태생 문제였다. 박정희의 한국은 케네디에게는 골칫덩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케네디는 자신의 등장을 새 시대의 도래로 규정했다. 군사력에 의지해 힘의 균형을 추구해온 과거의 전략적 사고에서 벗어나 가난, 질병, 전쟁이 사라지는 세상을 만들자고 세계를 향해 외쳤다. 미국은 이런 인류 공동의 적에 항거하는 싸움에 나서는 나라와 사람들을 끝까지 돕겠다고 했다. 케네디의 감동적 외침과 호소가 전 세계에 울려 퍼진지 고작 4개월 뒤, 한국에서는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합법 정부가 한방 중 쿠데타로 무너졌다. 60년 대 초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대한민국을 40억 달러가 들어간 보호 대상(ward)라고 불렀다.

5·16 쿠데타는 더 많은 미국의 원조와 지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경제 발전을 정권의 정당성과 연계시켜 놓았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가 혁명공약의 주요 부분 아닌가? 미국으로서는 독 밑의 구멍이 더 커진 형국이었다. 나중에 수십억 달러의 마중물을 쏟아 부었음에도 한국은 미국의 실패작 중 하나다 "one of great failures despite billions in pump priming"이란 탄식이 워싱턴 정가에서 터져 나올 만 했다.

쿠데타 지도자 박정희에 대한 편견은 미국의 정치권 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언론은 박정희를 지독한 사시(斜視)로 바라보았다.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은 그를 "매의 얼굴을 가진 수수께끼(hawk-faced enigma)" "무표정하고 뾰족한 눈을 가진 두목(the flinty, gimlet-eyed boss)" 심지어는 "촌놈(country boy)"이라고까지 칭했다. 요즘의 시각에서는 쿠데타에 대한 찬반을 넘어 민족적 수치심과 분노를 유발 할 수 있는 폄훼였다.

박정희를 불신한 케네디

박정희는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의 요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엄격히 따져 왜 쿠데타 같은 불유쾌한 일을 저질렀는지 와서 설명하라는 투였다. 필자는 11월 16일 박정희가 워싱턴 프레스 클럽에서 행한 연설을 주목한다. 그의 첫마디가 "우리 한국인들은 여려분 미국인들 못지않게 군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였다. 한국인은 일본의 "무자비한 군정의 뼈저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라고도 했다. 따라서 그는 군사정부를 옹호하려 미국에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어지는 긴 연설에서 박정희는 열정적으로 "군사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사회 전반에 걸친 타락과 무력함, 정쟁에 휩싸인 정치권의 혼돈,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내부 공산주의자들의 준동, 그리고 극도로 둔화하고 쇠퇴한 경제 문제들을 열거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자신의 쿠데타를 "외과 수술"에 비했다. 그리고 혁명적 변화를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외과적 수술로만 족할 것이 아닙니다. 누적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병폐 등으로 고찰하여 볼 때 한국은 건전한 신체적 상태를 얻기 위해서 철저한 수술 후의 요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미국의 민주주의 '훈수'에 대한 반론이었다. 미국의 언론들은 혁명정부의 밀수품 화형식, 호화로운 경조사 처벌, 탈세 혐의를 받는 기업인의 구금과 같은 극약처방에 빗대어 박정희를 "군복 입은 청교도"라 칭했다. 이제 "마녀사냥을 멈추고 집안 꼴부터 챙기라"는 조언도 튀어나왔다.

이런 미국 내의 비판적 여론에 굴하지 않고 혁명을 계속해 나가겠다는 선언을 했지만 박정희는 불안했다. 연설 말미에 박정희는 평소 자존심 강한 그의 면모에 고려할 때 수치감이 없지 않았을 발언을 한다. "귀국에 있어서나 우리나라에 있어서나 귀국의 성의 있는 경제 및 군사 원조가 사용되어 온 방법에 대해서 많은 비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 중의 한 푼도 결코 낭비되지 않을 것을 본인은 여러분들에게 확약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본인이 조금 전에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군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몇 가지 정직한 과오를 범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군사혁명이 불가피 하였음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이룬 조기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본인은 덧붙여 말하고자 합니다." 이때 박정희는 'Korea'란 물건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시장에 홀로선 세일즈맨이었다. 그의 결론은 실제 상황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는 간절한 희망사항으로 들린다. "끝으로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군사혁명의 결과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여러분들과의 유대가 강력하며 공고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의 희망사항과 달리 케네디는 결코 그에 대한 불신을 떨치지 않았다.

역사의 시간을 다시 앞으로 돌린다. 1965년 5월 박정희는 워싱턴을 찾았다. 상황은 4년 전 케네디와 만났을 때와 달랐다. 이제 그는 합법적 정부의 대통령이었고 야심 찬 경제 개발 계획도 추진 중이었다. 하지만 초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정부의 운명과 한국의 미래는 미국의 원조와 지원과 직결되어 있었다.

미국의 원조와 한국의 미래

당시 존슨 정부의 내부 문서를 분석하면 박정희가 느꼈던 불안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1억5000만 달러의 개발 차관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문제는 이 차관을 얼마 동안 제공할 것인가 였다. 존슨 정부의 내부 합의는 3년. 대외 용어로는 "앞으로 수년에 걸쳐" 였다. 박정희와 정부 관계자들이 말 그대로 애걸을 하며 앞으로 수년이란 표현을 없애 달라고 했다. 수년에 걸쳐서 찔끔찔끔 상황을 봐가며 차관을 제공할 경우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데 국민용 메시지가 희석된다는 이유였다. 또한 미 의회의 인준을 거쳐 원조를 제공한다는 표현도 빼달라 했다. 앞으로 원조를 얻을지, 못 얻을지 확실하지 않다는 뉘앙스가 있다는 한국 정부 측의 호소였다. 존슨 정부는 일체의 조건을 명시하지 말자는 간청을 수용하지 않았다. 표현은 약간 바뀌었지만, 미국은 차관을 수년에 걸쳐 나누어 제공하며, 모든 원조는 의회의 인준을 받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명시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실은 미국의 원조에 관한 박정희의 약점과 불안심리를 꾀 뚫었다. 박정희가 규모가 확실하게 명시된 원조계획을 공표하길 원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반대세력에 대해 극심한 두려움(acute fear)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를 이용해 미국이 한국을 일본의 품속으로 떠민다(abandoning their country to Japanese control)고 믿는 한국인들의 비판에 민감하다고 분석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조성된 상태에서 박정희는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요청 받은 것이다.

1977년 전 세계에 디스코 열풍을 불러온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스태튼 아일랜드를 바라보는 브루클린의 한 전형적인 이탈리언 이민자 사회. 늘 붙어 다니는 동네 친구들이 있었다. 운동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주먹질도 뛰어난 '절친' 그룹이었다. 이 중 한 명 예외가 있었다. 신체가 왜소한 그는 다른 친구들을 유흥장과 싸움판에 데려다 주는 운전사 노릇이 고작이다. 친구들은 그를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겁쟁이라 놀렸다. 어느 날 밤. 절친들이 브루클린과 스태튼아일랜드를 잇는 베라자노 브리지로 몰려가 현수교 철선에 매달려 까불며 논다. 이때 그 겁쟁이는 다리 난간 제일 끝의 철선을 기어오른다. 그는 친구들을 향해 소리친다.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똑바로 봐!" 케이블에서 한 손을 떼고 다른 한 손으로만 매달리기까지 하다가 바닷속으로 추락한다.

위의 영화 장면에서 나타나는 왜소한 젊은이의 행동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과장된 보상 심리(over compensation)'에서 비롯된 것이다. 친구들의 무시 속에 그는 열등감에 시달려 왔다.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조금씩 변화시켜 가기보다는 과격한 행동으로 일거에 용기를 과시하려 했다.

베트남 파병으로 얻은 보상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결단이었다. 자기 나라에서 적과 대치해 있는 상황이었고 실전 경험도 없었지만, 박정희는 연 인원 30만 이상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이런 한국을 보면서 윈스롭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가 주장했다. 미국의 '우방 중 베트남 전쟁에 관한 한 한국만한 기록을 가진 나라가 있는가? 소위 '맹방'이란 유럽국가들은 물론,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가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구는 절대 지나치지 않다."

영화와는 반대로 보상 심리는 한국에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파병 2년 후인 1967년, 존슨은 미 의회에 한국에 대한 자신의 경의를 표했다. 한국은 강해져 국내적 발전을 실현한 것은 물론 베트남에서 자유를 지키는 데 도움을 제공한다고 했다. 박정희가 베트남 참전에서 받은 가장 큰 보상은 한국의 참모습이 보인 사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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