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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제13회 시애틀문학신인문학상 심사평

시 부문 심사평, 김백현 시인 “시가 꿈꾸는 것도 서사와 서정의 균형이다!”
시 부문 스텔라 김(우수상), 권 용(가작), 동시 이원정(우수상) 씨 수상작 심사평 전문 게재

심사평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서론 삼아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초에 우리는 지상의 몸과 천상의 마음이 용접되면서 태어났습니다. 살면서 점점 몸은 현실에 육화(肉化)되고 마음은 현상에 산화(酸化)되는 전쟁과 평화의 과정을 밟습니다. 이때 발생하는 콘텍스트가 바로 시(詩)라고 생각이 됩니다.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몸은 현실이 “응결된 실존이며, 실존은 끊임없는 육화이기 때문에” 마음은 몸을 통해 실현되고, 마음의 문장은 몸을 거쳐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마음의 문장을 서정시라고 한다면, 몸의 문장은 바로 서사시가 되겠습니다. 이런 서사와 서정의 정의는 상대적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절대성 이론은 없는 것이니까요. 현실이 기르는 서사의 몸과 현상이 산패(酸敗)시키는 서정의 마음이, 우리에겐 공존하고 있음으로 이들 간의 전쟁과 평화는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이질성의 갈등을 극복하고 화평시키기 위해서, 서사와 서정의 균형이 충분할 만큼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시의 흐름입니다.

메를로 퐁티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하면서 심사평으로 넘어갑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드러남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깊이다.” 이 말을 쉽게 풀이하면 ‘몸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드러남이고, 마음은 보이는 몸의 깊이다.’ 더욱 더 쉽게 풀이하자면 ‘서사는 보이지 않는 서정의 드러남이고, 서정은 보이는 서사의 깊이다.’라고…

풍선 같은 서정일지라도 뿌리 없는 서정은 쓰지 말자



시 부문 우수 수상자 스텔라 김의 ‘나의 청춘에게 바치는 편지’부터 보자. 이 시는 지나가 버린 청춘에게 바치는 애증 어린 고백송이다. ‘기억을 가지고 만드는 장르가 시’라고 한 슈타이거의 말처럼 이 응모자도 기억을 통해 청춘이라는 잊혀진 서사(敍事)를 현재로 호출하고 있다. 청춘을 향한 그리움은 시 전편을 부유하면서 자아를 정체성의 자아와 페르조나의 자아로 해체하면서 재구성한다. 페르조나라 함은 현대인의 위험성을 알리며 칼 융이 꺼낸 말로, 개인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쓰는 사회적 가면, 사회적 체면이란 뜻이다. 클라인은 이를 확장시켜 서로 모순되는 두개의 자아가, 의식에서 통합되지 않은 채 공존하는 ‘자아분열’을 주장했는데 이번 응모자의 시가 바로 그렇다.

내 입맛에 맞게 이뤄낸 것 하나 없이 살고 있는 지금의 나와, 주변 사람들의 눈맛에 맞게 그저 착하게만 살다 간 내 청춘의 관계가 그런 것이다. 청춘을 조목조목 꼬집듯이 헤집으면서도 미안하다고 다시 주섬주섬 챙기는 그리움의 밀도가 농밀하다. 이런 이질적 행위는 황혼녁의 나를 현실이 육화시킨 서사의 몸으로, 페르조나의 나는 과거가 산화시킨 서정의 마음으로 설정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런 구축력에서 응모자의 기량이 돋보인다.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우리는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우리의 서정은 태초의 원형(原型)에서 멀어질 때 불안을 겪는다. 서사와의 채워지지 않는 거리, 이 격리의 다른 이름들이 ‘그리움’이고 ‘불편함’이고 ‘불안함’이다. 자신의 지금이 ‘내내’ 불편했다고 고백함으로써, 이 불안이 본질적인 것임을 자인하면서 평화를 청하는 것이다. 소위 현대시에서 추구하는 ‘자아와 타자 간의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역공적인 사유로써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수상작의 말미 부분을 보자.

하지만 이젠 너를 제일 사랑하면서 사는 시간이 되도록 할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도록 해 볼게.
너를 먼저 들여다볼 수 있도록,
너에게 희망을 품어 볼게.

아직 아직 네가 지금 여기 남아 있다면....

‘아직 아직 네가 지금 여기 남아 있다면....’, 이 결구가 절창이다.
응모자는 여백으로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추억하는 건 늙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야. 너를 다시 만나게 되면... 모든 잎이 지는 가을을 두 번째 봄으로 만들고 싶어’

매혹적이다. 매혹적이라 함은 좋은 시의 덕목인 흥미, 재미, 의미 곧 삼미를 한 편의 스토리로 깔 줄 안다는 뜻이다. 하지만 완성도에서 떨어지는, 아쉬운 점도 상당하다. 언급하자면, 황혼녁의 그리움이 짠한 것은 그것이 고통의 서정을 지니고 있음이다. 그런데도 이 시에서는 고통이 실감되지 않고 있다. 마치 한 편의 고해성사를 듣는 것처럼 담담하다. 왜일까? 그 까닭은 넘쳐나는 서사에 비해서 의외로 서정시에 서정이 빈약한 것이다. 첫 연을 보자.

미안해, 나의 청춘아.
남들은 역사를 살았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정말 찐하게 놀아봤다고도 하고,
누구는 뭔가를 이루어 냈다고도 하는데
나는 너를 자랑스럽게 한 일이 없구나.

서사가 즐비하다. 서정이라곤 ‘미안해’와 ‘자랑스럽게’인데 이 마저도 질문의 수용체로 단순 처리되어 오히려 서사의 편에 서고 있다. 나머지 연들도 이와 유사하다. 왜, 하필이면 그리움은 해질녁에 찾아오는가? 이런 질문이 없는 것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너를 가둘 수 있었던 장밋빛 청춘도 멀리 사라진 저녁 나절, 죽은 청춘은 너인데 그게 곧 나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의지 너머에서 서서히 저물어가는 몸, 저 소멸과 스러짐 앞에서 마음은 그리움 말고 또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과연 죽음은 삶의 마지막 잔해, 청춘을 모두 소비해버린 삶에 불과할 뿐일까?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이런 통절한 질문이 있어야 서사와 서정 사이에는 비극적이라 할 만한 긴장이 성립되지 않을까? 그 긴장의 지극한 형식이 ‘그리움’ 아니겠는지, 수상자는 숙고해 보길 바란다.

다음은 권 용의 수상작 ‘텃밭 인생’을 보자.
첫눈에 눈길을 사로잡은 수상자다. 간략한 시어의 구사, 예사롭지 않은 이미지의 포착력 등으로 심사자를 긴장시킨다. 그러나 과속일 것이다. 사유의 안이성이 주제의 심각성을 훼손하고 있다. 눈에 보인다. 시간이 촉박하였나 보다. 작품들 간의 편차가 너무 껄끄럽다. 하지만 시적 내공만은 기대된다. 사물시가 대부분 그렇지만 응모자도 투사의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시적 대상과의 몰아일체{沒我一體)를 정공적 사유로써 실현하려고 한다. 투사라 함은 시적 대상에 자신의 삶을 용해시켜 그 본질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 응모자의 저력이다. 텃밭이라는 풍경을 바깥에서 수평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 내부로 들어가 본다. 텃밭 속으로 들어가 여러 채소로 변신하여 흙과 한 몸이 되어봄으로써, 그 풍경은 응모자의 생애로 환치되고 있다. 하나의 풍경에 인생이 대입되는 것이다. 흘려 버린 흙엔 뒤틀린 마음과 추락한 시간을 묻고, 움켜쥔 흙엔 결실의 꿈을 담겠다는 신토불이의 정신이 눈을 크게 뜨게 한다. 사물에 대한 설명이나 관념은 시를 읽을 때는 쉽게 이해되지만 시를 읽고 나면 곧 잊혀진다. 그러나 이미지는 감각적 실감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응모자는 이를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서사로만 기운 치중이 치명적이 된다는 것을, 사물시에서 서정이 빈약하고 서사가 넘친다는 것은 큰 실수다. 서사의 밭에 오아시스 같은 그늘이 서정이다. 그렇다면 신토불이의 서사에 어떤 서정이 당연할까?

틀린, 추락한, 슬픔, 외로움, 아픈 사랑, 님의 향기 등등은 서정이라기보다 번지 없는 풍선과 같다. 세상 모든 것은 이질적인 것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홀로 당연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접속되어 있다. 바다도 땅과 용접되어 있다. 한 살에 다른 살이 보태지거나 떨어질 때, 용광로 속과 같은 ‘처절한 비명’이 있었을 것이다. 태초의 대답으로 존재하는 ‘당연함’에서 응모자가 첫 질문을 찾아낼 수 있었다면 서정은 홍수를 이뤘을 텐데, 그랬더라면 정공법보다 차원 높은 역설법을 구현할 수 있었을 텐데, 수상자와 함께 공부하고 싶은 과제다.

마지막으로 동시부문 수상자 이원정의 ‘피아노와 방울새’를 보자.
이런 예쁜 시를 쓴 사람은 얼마나 예쁜 사람일까,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한 가닥 남아 있는 누구나의 기억도 이럴 것이다. 라디오 속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둥, 이 시를 읽고 있노라니 흰 것, 검은 것, 86 마리의 방울새들이 변방인 듯 날아와 뽀롱뽀롱, 가뭇한 추억속에서 노니는 것이다. 이 맛에 동시를 읽는다. 언어로 가꾼 풋풋한 과일의 맛, 키 큰 나무 이욤이가 뒷마당에 이불을 깔고, 하늘에서 곰들의 가족이 놀러오고, 밤 한 보따리가 바다를 건너오고, 달을 그린 편지를 밤하늘에 띄우고, 이런 ‘마술’은 오직 동시의 언어로만 가능하다.

마법사의 손에서 나오는 저 아삭아삭한 것들. ‘타닥타닥 개나리 꽃 피어나듯’ 사물을 튀겨내는 저 동시의 공방. 엘리엇은 이질적인 것을 연결시키는 이런 상상력을 ‘통합된 감수성’이라 했다. 천상의 동심이 죽은 사물을 새롭게 살려내는 감수성, 이게 동시다. 동시를 허무 개그쯤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유치와 천진을 알아보는 눈치가 없는 탓이다. 문제는 아이들의 눈높이다. 누가 말리랴, 눈에 낀 더께부터 벗겨내고 볼 일이다.

동시의 세계는 경계가 허술한 것이다. 알에서 깨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서다. 천상과 지상 사이에도 막힘이 없다. 따라서 대답이 질문이 되기도 하고 질문이 대답이 되기도 한다. 서사와 서정의 관계도 이와 같아서, 병아리들은 삐약삐약 철이 들 때까지 떠드는 것이다.

아이들을 저능아로 보지 말자, 아직은 지상의 몸이 서투르니. 동시를 잠언으로 보지 말자, 아직은 천상의 마음이 남았으니. 동시를 쉬운 시로 보지 말자, 쉽게 쓰기가 더 어려우니. 수상자에게 부족한 점이 많아도 못 본 척하자. 수상자의 책임이 많으니. 동시를 굳이 읽는 이유는 살아갈 기적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가. ‘쉬어 보이지만 불가능한 것, 그것이 걸작이다’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결론이다. 풍선 같은 서정일지라도 뿌리 없는 서정은 쓰지 말자. 예술에서 절규보다 더한 진정성은 없다. 화가 뭉크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고통, 울부짖음 등을 표현한 그림 하나로 단연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문학도 마찬가지 아닐까. 들려주는 소설, 속삭이는 동화와 대비해, 시는 절규의 미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시에서 절규 즉, 진정성의 유무는 시의 완결미를 높이는 데 필수다. 절규의 사전적 정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절하게 애타게 부르는 부르짖음’이다. 이 말은 핍진성(逼眞性)을 두고 한 말이다.

독창성, 명징한 이미저리, 공감을 주는 상상력들은 서사와 서정의 균형과 함께 시적 리얼리티를 완결시키는 핵심 요소다.

‘내가 꿈꾸는 것은 바로 균형의 예술이다’ 앙리 마티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인용하면서, ‘시가 꿈꾸는 것도 서사와 서정의 균형이다’라는 말로써 이만 끝내겠습니다. 몸과 마음의 균형이 수상자 여러분에게도 있으시길 바랍니다.

심사평: 김백현 시인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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