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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강의 고시랑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먹기 위해 산다고는 하지 않을 것은 확실한데, 가만히 생의 물결을 잠재우고 들여다보면, 난 확실히 먹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만큼, 먹는 데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살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나의 주 업무가 ’집안일’이다 보니, 그게 그렇다.
세 식구들과 함께 살기에 밥하는 데 바쳐지는 시간은 적지 않다. 또 노력과 정성과 에너지는 어떠한가? 가히 어마어마하다. 뭐 그닥 잘 차린 밥상이 아니라도 그렇다. 고작해야 매끼 찌개 하나에 전 하나 부치거나, 아니면 국 하나, 콩나물 반찬 하나에 생선 하나 굽거나, 간혹가다 그런 류에다 두어 가지 더 곁들이게도 되고, 또 때로는 잔칫상 같은 상차림을 할 때도 있지만, 어쨌거나 소박한 정도의 4인용 상차림을 하는 데도 한두 시간은 거뜬히 소요되기가 일쑤다.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씻고 다듬고 자르고 데치고 지지고. 그리고 그 사이사이 사용했던 커다란 믹싱볼이나 도마나 그릇들도 씻으면 한두 시간은 요술쟁이처럼 눈 깜빡할 사이에 삭 사라진다. 그때 그 삭 사라진 ‘한두 시간’은 분명 내 두 종아리 속으로 들어가는 게 분명하다. 종종거리며 찬거리를 준비하는 동안의 그 시간은 내 두 종아리 속을 제 집처럼 차지하고 종종 들어 앉아있게 된다. 통통하게 다리가 부어오른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통통하게 부어오른 다리로 밥과 국, 반찬 몇 가지를 만들어 배고픈 식구들과 함께 먹는 것은 내 생을 바쳐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업이다. 반들거리는 부엌에서 맛깔 난 밥상을 탄생시키는 일은 비록 찬 종류가 적더라도, 비록 단 몇 사람의 배를 위한 소소한 일거리라도, 그 누구의 그 어떤 거사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소중한 사업이라는 생각이 진해질 때가 있다. 그때는 허기져 밥 달라는 식구들의 뻐끔거리는 두 입술 사이로 통통해진 이 두 종아리를 훈장삼아 이 손끝으로 조물조물 버무려낸 음식들이 후룩후룩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다. 아귀아귀 먹는 그들의 입 언저리만 봐도 몇 시간의 노고가 존대받는 느낌이 들며 큰 일을 해낸 것처럼 마음이 뿌듯해지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은 중요한 일을 잘 해냈을 때이지 않은가.
자신의 몸의 희생으로 다른 이의 몸이 윤택하게 될 때 느끼게 되는 그 뿌듯함이 이럴 때면 찾아드니, 큰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위대한 일을 이 생이 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은 아무 생각없이, 아이고... 오늘은 무슨 반찬을 또 한담? 그러면서, 아이고 힘들어, 하기가 태반이다. 푸념 반, 낙심 반으로 보낸 세월은 그 얼마이련가. 그도 그럴 것이 이 밥 만드는 일이란 게... 영 표시가 나질 않기 때문이다. 다리가 땅땅하게 붓도록 종종거리기를 짧지 않은 시간 해내어도 고작해서 남겨지는 거란 손바닥 만한 종지에 쏙 들어갈 만큼의 시금치 나물 한 줌과 보글거리는 찌개 한 솥 뿐이게 되니, 그때 느껴지는 허망함이란... 그렇게 몸과 시간을 바쳐 일을 해내도 덩그라니 남는 건 반찬 몇 개 뿐이니 어찌 당혹스럽지 않을까. 내 목숨의 두어 시간과 땅땅해진 내 두 다리가 남기는 게 고작 반찬 몇 종지 뿐이라는데...
그러나 그 허망감도 오래가진 않는다. 식구들의 꼬르록 배곯은 소리가 그 허망감을 단번에 물리쳐 주기 때문이다. 꼬르륵거리며 우걱우걱 먹어주면 단숨에, 내 삶은 무엇인가, 하던 그 허망감이 소리소문 없이 그 자취를 감춘다. 식구들의 오물거리는 그 입매와 만족해 하는 그 눈매가 상급처럼 내 시야 안으로 우수수 쏟아져 내리면 이내 행복이 찾아든다. 바로 그때 난 내 생의 기쁨과 활력을 되찾는다. 보람을 느낀다. 살아 있다는 게 정녕, 정녕 즐거워진다.
내 생의 몇 시간을 아낌없이 매일매일 뚝뚝 떼어내서 촌스러운 밥상을 차려내는 게 내 생의 기쁨이 되기까지 나는 수많은 세월을 밥상차리기에 내어 주었다. 멋도 모르고 시작했던 결혼과 육아 그리고 밥상차리기는 이제 내가 되돌아보고 귀히 여기고 사랑해야할 나만의 사업이 되었다.


얼만큼 귀한 일을 한 건지는 실은 잘 모른다. 다만 그건 분명 선하고 가슴 따뜻하게 하는 일이란 것만은 알 것 같다. 그건 나 또한 그런 밥상을 받아본 적이 있기 때문이리라. 엄마가, 할머니가, 이모가, 친구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밥상... 그 모든 밥상들이 나를 밥 만드는 여자로 키워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밥 만들며 산지도 어느덧 이십오 년을 넘어가는데, 이제야 그들 밥상의 진가를 맛볼 수 있게 된 듯도 하다. 지난 세월 속에서 수도 없이 받아왔던 밥상들을 기억하며 고마워하는 이유는 어쩌면 내 촌스러운 밥상에게도 그런 의미를 심어주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소박한 밥상 차리느라 보낸 내 목숨같은 세월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서일 것이다. 어쩌면 삶은 사랑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랑스러운 게 아니라, 사랑하므로 사랑스런 것이 되어지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귀한 세 사람, 그리고 여러 이웃들의 허기진 배를 위해 내 생은 창조되었나 보다. 오늘도 이 생은 떼어져 나눠졌었으니까... 나 아닌 다른 이들의 몸을 위해 이 몸뚱아리를
‘사용하고’, 이 목숨과 같은 시간을 ‘내어주어서’, 손 바닥 만한 종지에 들어갈 양의 시금치 나물 하나 씻고 데치고 양념 넣어 조물거리는 건 그 일의 형국에 비해 어쩌면 실제로는 더 큰 역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생의 마지막날에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다름 아닌 바로 밥상차리기가 될 테이니까. 따끈한 국 한 그릇 마련해서 기름진 밥과 함께 식구들에게 바칠 수 있다면 그걸로 생의 농도 짙은 희락은 내것이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내가 차린 밥상에 위대함이란 게 혹여라도 서려있다면,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이들이 차려준 밥상의 위대함, 그 따스함을 조목조목 기억해내는 일은 불가피할 듯하다.
이십 년 전 받은 밥 한 종지와 부추 송송 썰어 넣은 된장찌개에 서린 추억이 아직도 이리도 따스하다. 남을 위해 차리는 밥상의 힘은 그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 기나긴 세월을 거뜬히 역류하여 낡고 시들어가는 사람의 심장 한켠을 사무치는 그리움과 따스함으로 달래주는 것은 오직 이런 류의 기억이 아니겠나 싶다. 밥이 품은 위력이다.
사람과 밥, 어찌 떼어 놓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면서 생각 속에서 훈련시켜대던 허공 속의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리라였지만, 실상 내 삶의 정중앙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바로 ‘밥상’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한 종지 시금치 나물 조물조물 무쳐내어 그 누군가의 입속을 즐겁게 하고 그 누군가의 뱃속을 기쁘게 하는데 바쳐지는 내 생의 조각조각들이 하나님께서 흠향하실 만한 향기가 되어지길 간망해 볼 따름이다. 이렇게밖에 못 살아온 이 생도 그분의 마음에 기쁨 한 조각이 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조바심에 이 소원은 더욱 진해져 간다.
이제 누군가 내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난 먹으려고 산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장래에도, 종종거리며 땅땅하게 부은 두 다리로 열심히 만든 촌스런 밥상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으로 나라는 사람에게 맡겨진 소명을 다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측은히 보시고 흡족하게 내려주실 이 생의 깊은 만족을 밥상차리는 횟수 만큼 가슴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잠시 허망했다 이내 뿌듯해지는 그 느낌은 이 가슴에 변치 않는 만족으로 쌓여져 갈 것이다. 그 만족이 지켜주는 이 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 밥상같은 소망이 이 여름처럼 더욱 푸르러지길...
생의 소망이 ‘밥상 차리기’라면 너무 촌스러울까?
왜 사느냐고 묻는 물음에 ‘먹기 위해 산다’고 하면 너무 유치할까?
그래도 난 밥상차리기를 소망하고, 먹기 위해 사는 걸 뿌듯해 할 것 같다. 그걸 제일 잘 하고, 그걸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게서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어디서 누리련가. 내가 일구어내는 소박한 밥상으로, 금세 만든 밥처럼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슴이 되돌려지는 찰나가 그 누군가에게서 있어질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태어난 보람이 있을 듯하다.
밥 만드는 여자니 밥으로 소망을 끓여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듯하다. 오늘 사람다운 마음이 되돌려진 것 같아 마음이 단비를 머금은 듯 흡족해진다.


* Bobbi Kang / 전업주부, 페이퍼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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