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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사는 이야기] 미국 트럭커의 사는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 - 트럭 면허 취득을 위하여 LA로

인생이란 유위전변(有爲轉變: 불교용어로 이 세상의 사물은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어 항상 변천하여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일 - 편집자주)이라 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다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내가 이렇게 이민을 오리라 반년 전만 해도 생각을 못했건만 지금 미국에 와 말그대로 하루하루를 허겁지겁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내색은 안 하지만 비즈니스 때문에 시간을 내기 힘들어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하루도 안 빠지고 내게 찾아와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일을 처리해주는 동생이 고맙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했다. 미국에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동생만 이런 것인가 동생을 쫓아다니며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땐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서 살아보니 그리 안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일사천리라 했던가. 모든 일 급하게 처리하고 나니 갑자기 적막이 흘렀다. 눈을 뜨니 할 일이 없었다. 뭔가를 해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이민 서류작업이 끝나니 동생이 찾아오는 횟수도 줄고 이제는 혼자서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인간이란 습관적 동물이기에 현재의 상태에 머물면 곧 그것이 생활화돼 버린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조급한 생각에 미국 오기 전 트럭에 대하여 의논을 했던 LA에 사는 분이 생각나 전화를 했다. 굳이 그리 급하게 안 해도 되었는데 타국이라는 강박관념이 나를 압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전화하니 멀리 뉴욕 쪽에 있는데 일주일 뒤에 LA로 돌아간다고 했다. 만나보고 싶다는 제안을 하고2-3일을 기다린 후 난 무작정 LA로 향했다. 길을 모르니 네비게이션과 옷 몇 가지 챙겨 아무런 준비도, 상식도 없이 LA로 떠났다. 이민 와 처음 산 중고차를 끌고 무작정 LA로 향했다. 길게 뻗은 도로,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늘 흐린 날씨 속에 있는 워싱턴주를 벗어나니 날씨가 너무 좋았다. 기분전환이 됐다. 해방감이랄까...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을 달리다 보니 점심도 굶어 허기가 몰려와 영어가 별로 필요없는, 만만한 맥도널드에 들어갔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신있게 손가락으로 사진에 있는 번호를 가리키며 “I WANT NUMBER ONE PLEASE”를 외쳤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종업원이 뭔가를 묻는다. 그냥 알아서 주면 좋으련만 알 수 없는 질문에 “YES”를 했다. 그랬더니 또 질문을 한다. 그래서 또 “YES”를 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또 무언가 질문을 한다. 이젠 당황스럽다. 그러나 어쩌겠나. 끝까지 “YES”로 밀고 나갔다. 질문이 끝났는지 3.50달러만 내라고 한다. 가격표에는 10달러 정도의 가격이 표시되어 있는데 3.50달러라니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저녁 ‘HAPPY Hour’ 할인시간인가 하는 기대감에 운 좋은 시간에 내가 왔구나 하고 내 번호 부르길 기다렸다. 드디어 호출! 맛있는 저녁을 받으러 갔다. 쟁반에 담겨있는 음식이 사진에서 본 것과는 아주 달랐다. 콜라도 없고 감자튀김도 없이 오직 작은 박스 하나였다. 자리에 돌아와 박스를 여니 달랑 햄버거 하나만 들어 있었다. 햄버거 안에 햄도, 고기도, 야채도… 아무것도 없이 오직 빵만 겹쳐져 있었던 거였다. 뭐라고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영어가 안 되니... 할 수 없이 배고픈 저녁을 음료수도 없이 꾸역꾸역 아니 빵도 크지 않으니 몇 입 베어 그냥 집어삼키고 차에 돌아와 생수로 대신하곤 다시 길을 떠났다. 지금도 그때 그 직원이 무엇을 물어봤는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석양이 잠시 걱정을 잠재우니 이것을 보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란 말이 나왔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석양에 취한 마음도 잠시, 어둠이 몰려오니 마음도 어두워진다. 어찌할까나 이제 반 왔는데... 모텔에 가자니 어떻게 해야할 지 또 영어도 겁나고 밤새 달리자니 졸음이 몰려오고. 일단 졸려 못 갈 때까지 달려보기로 하고 계속 달렸다. 몇 시간을 더 가니 졸음 때문에 도저히 갈 수가 없어 ‘REST AREA’로 들어갔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맥도널드에서 화장실을 간 후 한 번도 화장실을 안 간 것 같았다. ‘REST AREA’에 들어가니 트럭과 승용차가 머물고 있었다. 놀랬던 것은 한국 휴게소에 가면 온갖 식당과 필요한 물품 가게가 즐비한데 미국은 달랑 화장실 하나만 있다는 것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완전 기대치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게 뭐지?...

자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도 잠시, 워낙 긴장감에 피곤함이 몰려와 한구석에 차를 세워놓고 행여 하는 두려움에 차문을 확인하고 새우잠을 청했다. 잠시 누운 것 같은데 눈을 뜨니 먼동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엔 세수와 양치질은 사치였다. 다시 길을 떠났다. 장거리 트럭 일을 하기 전, 미리 경험한 ‘집 떠나 차에서 잠’을 잔 첫경험이었다. LA에 다다르니 다시 저녁이 되었다. 영어 공포증에 종일 굶고 온 터라 한글로 쓰여진 식당 이름이 왜 그리도 반갑던지 무작정 한국식당에 들어가 이틀 굶은 배를 채웠다. 배가 부르니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고, 한글 간판이 많으니 안도의 숨도 쉴 수가 있었다. 오면서 지인과 약속을 하고 저녁 8시경 한국 마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늦어진다는 연락이 왔다. 영어 없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같은 민족이 오고 가니 늦어도 걱정없다고 했다. 열 시가 넘어도 지인은 오지 않고 마트도 문을 닫는다. 옆구리에 총을 찬 SECURITY가 슬금슬금 내 옆을 맴돈다. 주차장에 차도 거의 빠져나가고 마트도 쇠창살 문을 잠근다. SECURITY가 다시 한 번 내 옆을 스치며 나를 유심히 본다. 조금 전까지 그리 북적이던 거리가 약속이나 한 듯 한가해진다. 생각지도 않던 두려움이 몰려온다. 밤 열 시면 한국 같으면 이제 시작인데 여긴 고요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연속극에서 보던 호화로움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도시, 말로만 듣던 LA도 밤 열 시가 되니 상가는 문을 닫고 오고 가는 사람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초라한 모습으로 지인이 나타났다. 먼 길 운행으로 제대로 씻지 못하고 기름때가 옷에 듬성듬성 묻어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도 씻지 못해 행색이 말이 아닌데 나보다 더했다. 늦은 밤이라 긴말을 못하고 거듭 트럭을 왜 하려 하느냐, 고생이 심하다, 길에서 차 고장나면 난감하다, 돈 많이 든다. 생각 잘해라. 격려보다는 마음에 짐만 잔뜩 안겨주고는 아직 집에도 못 들어갔으니 가 봐야한다고 하곤 훌쩍 떠나 버렸다. 숙소도 없고 당장 잘 곳도 없는 처지라 난감했다. 어디로 가지? 듣기엔 LA는 강도도 많고, 총을 가지고 있으니 밤늦게 혼자 걸어다니지 말아라, 위험한 도시다… 듣고 온 것이라곤 공포스러운 말만 전해 듣고 왔기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래도 한국 마트가 있는 마트 주차장이 낫겠지 하고 있으려니 SECURITY가 나가라고 한다. 쫓겨난 신세가 되어 무작정 차를 몰았다. 어딘지도 모른다. 밤길을 달리다 보니 도로 옆에 커다란 몰이 있는데 한가하기 이를 때 없어 보였다. 무작정 그 몰로 갔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 차를 세워놓고 문이 잠겼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쪼그려 잠을 청했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달은 보름인가 밝기 그지없었다. 차안에서 뒤척이면 차가 들썩이는 모습이 나쁜 사람 눈에 뛸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화장실도 못 갔다. 긴장되니 별로 생각도 없었다. 그저 무사히 이 밤이 넘어가길 바랄 뿐이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스칼렛 오하라의 명대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라는.

그러나 난 내일을 생각할 여유도 없다. 지금 당장 안전이 우선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받았던 인사 중 하나가 ‘복 받을 거예요’였다. 당연한 거다. 내가 하는 일이 복지(福祉) 업무라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니 도움받은 사람으로선 그 인사가 최상의 인사였으리라. 그런 인사는 특별히 남달라서 받는 인사가 아니라 관례 같은 인사였다. 어찌됐든 그 인사 생각 덕분에 난 무사히 그날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내일의 태양이 이렇게 뜨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난 어제 지인에게 받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트럭 학원을 찾아 나섰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적응하며 살아가기 마련. 도전 속에 결과도 나오는 법. 지난 날은 잊고 새로운 도전을 위하여 잠시 주춤거리던 마음을 접고 사막 위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나서듯, 난 내 길을 간다. 네비게이션 지시대로 한참을 가다 보니 내가 찾던 학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호화롭게 살았나, 기대치가 컸나, 모든 게 미국선 실망감으로 다가왔다. LA 도시도 한국의 소도시 같이 보잘 것 없었고 학원도 초라한 환경에 실망감이 앞섰다. 도대체 미국이 왜 강대국이고 선진국인지 또 다시 의문이 몰려왔다.

한국이 잘 살고 쓸데없이 건물들이 화려하고 큰 건지, 미국이 국가만 부강하고 개인은 못 사는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이것은 검소한 생활에서 오는 것이다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눈에 띄는 미국은 가난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앞으로 미국에 대한 공부를 더 하고, 더 깊은 것을 봐야 미국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트럭 학원이라 마음도 놓이고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위안은 되었다. 마음씨 좋은 학원장님의 조언으로 하숙집을 구하고 학원에 등록을 마쳤다. 드디어 트럭커로 향하는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렇게 미국에서 ‘홀로서기의 출발선’이 그어졌다. 잘 되리라 믿으며 내일을 기다려보며, 오랜만에 씻고, 마음 편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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