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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요가 선생의 따뜻한 이야기

[시애틀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4/12 07:37

두 번째, 처음으로 미국을 경험하다

1995년 여름, 고등학교 화학교사로 일하고 있을 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어 흥분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당시는 지금처럼 어학연수나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영어책이나 영화에서만 보고 배웠던 미국에 간다는 사실에 들떴다.

학교생활이란 게 신맛도, 단맛도 그렇다고 짜릿한 맛도 없는 무덤덤한 생활의 연속이었고, 매년 변하는 입시제도로 대학입시에서 과학이 선택과목으로 밀려나기도 해 학생들의 흥미가 없을 뿐더러 사춘기 반항 가득하고 매사 부정적으로 대항하는 남자 고등학생들을 다룬다는 것이 엄청난 스트레스였던 시기였으므로 이 기회가 매우 기대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문화충격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그날을 기다렸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도 이유는 모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은 동경과 욕망이 나의 내면에 있었던 것 같다. 외모도 그렇고 가난하였기에 공부 외에는 뭐 하나 특별한 장기조차 없는 나는 평범하기 그지없었고, 신분상승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린 나이지만 전혀 모르는 낯선 환경에 나를 던져 보고 싶은 꿈과 용기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거 같다.

어쩌다 특별한 날에만 가는 영화관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오는 날은 늘 가슴이 뛰었고 영화에서 보는 미국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그야말로 인생역전 드라마였다.

스포츠 경기에서 전반전에 점수가 밀리고 설사 실수를 하였더라도 후반전에서 맹렬히 추격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역전의 승리를 보여주었을 때 우리가 감동하고 박수를 주듯이 나도 지금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 어쩌면 내가 진정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인생 후반전, 역전의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93년 정권이 바뀌어 김영삼 문민정부 시대가 도래하면서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 바람이 교육계에도 불기 시작하였다. 교사들을 해외로 내보내서 선진교육을 경험하게 한다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서울과 직할시 그리고 각 도에서 과학교사 1명씩을 뽑아 정부예산으로 미국에 연수를 보내준다는 공지가 났다.

자격은 신청자에 한해 영어시험으로 결정한다는 내용이었고, 각 학교에서 한 명만 신청 가능하였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나를 포함 모두 5명의 과학교사가 있었는데 내가 가장 어리고 근무경력이 낮았다. 다른 선생님이 신청을 한다면 나는 자격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신의 축복이었는지 아무도 신청자가 없었다.

나를 위해 준비된 것 같은 이 잔치를 즐겨야 했으므로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시험은 영어 듣기, 읽기, 문법 세 가지를 테스트한다고 하였다. 학교 일이 끝나면 그동안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영어책들을 꺼내 밤늦게까지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대학교 4년 다니면서 화학을 공부한 시간보다 영어책을 끼고 다닌 시간이 더 많았으므로 책장에 있는 영어책들이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거 같았다.

드디어 시험날이 되어 시험장에 가니 큰 강당에 선생님들이 가득하였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려 하니 한 선생님이 “유치원 선생님 자격시험은 반대쪽 건물이에요.”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냥 미소를 짓고 빈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여자는 나 혼자다. 모두 나이 지긋한 오랜 경력의 선생님들이었다.

시험은 생각보다 쉬웠지만 1등만이 선택되기에 한 개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어쩌면 공지와는 달리 경력 많은 선생님을 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맘이 불안하였다. 대학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시간이상으로 초조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주일 후에 학교로 선발통지가 왔을 때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학교 뒤 담벼락에 서서 미친 여자처럼 웃다가 눈물도 찔끔거리다가 소리도 지르면서 환호하였다. 시험점수가 100점이어서 다른 사람과 타협이 안 되는 상황이라 경력 짧은 여선생을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게 되었다.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선발된 20명의 선생님들이 캘리포니아 UCLA(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의 기숙사에 짐을 풀고 40일 동안 미국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대학교 Lab에서 화학, 물리 실험도 하고, 서머스쿨에서 1.5세 과학 선생님의 수업도 참관하고, 학생들과 인터뷰도 하고 미국 과학 교과서도 살펴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 와보는 미국은 사람도, 건물도, 주차장도, 나무도, 꽃도 심지어 달마저도 모든 게 너무 크게 느껴졌고 경이로웠다. 길가 벤치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에 나오는 톰 행크스(Tom Hanks)를 연상시켰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반바지에 인라인 스케이트(Inline Skates)를 타는 할아버지들을 보며 내가 가지고 있던 노인에 대한 편견을 바꿔야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모두가 과학선생으로 영어가 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지만 수업이 끝나면 영화도 보러 가고, 수업이 없는 금, 토, 일을 이용해 차를 렌트해서 옐로우스톤, 디즈니랜드, 멕시코 등으로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참, 아이러니하게도 알찬 연수를 보내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내가 화학선생으로 산다는 것이 나에게도 학생들에게도 결코 도움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수 내내 과학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보람과 열정 가득한 백조 선생님들을 보면서 나는 백조가 아닌 닭임을 알아차렸고, 내가 백조로 인정받는 곳으로 옮겨가야 할 때임을 심각하게 느꼈다.

또 한편 내 남은 인생의 도전장을 미국에 던져보고 싶었고, 아버지가 우리 넷을 서울로 대학 보내야 한다면서 ‘무작정 상경’을 시도했듯이, 나도 내 두 아이들을 여러 인종이 섞인 큰 나라에서 교육시켜야겠다고 무모한 ‘무작정 유학’을 계획하였다.

시간이 흘러 나는 마음먹은 것을 그대로 실천했는데 그것은 아이들 교육과 나의 인생 후반전을 위해 이민을 신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민 과정은 너무나 더디고 느려서 차라리 잊고 사는 게 편할 지경이었다. 지루한 이민신청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 나는 드디어 학교를 퇴직하고 늦게나마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 하여 한국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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