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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 속편(연재)] 빛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③

[시애틀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4/18 12:50

(지난 호에 이어서)

우리 학년에서 인기를 독차지하게 된 나에게 학교당국은 학급장을 넘어 학교 소년단위원장직을 주었다. 학교 소년단위원장은 학교 전체의 소년단원들을 정치적으로 책임지는 역할이다. 학습, 소년단 생활, 과외 생활지도 등을 다양하게 조직, 지도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말하자면 소년 빨갱이 대장이 된 셈이다. 나의 수하에 18명의 분단 위원장들과 80명이라는 분단 위원들이 생겼다. 그들은 나의 지도와 임무에 따라 움직여 갔다.

나는 그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열정적으로 주입했고 나 자신도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공산주의 교양, 혁명 교양, 계급 교양으로 그들을 철저히 무장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위대한 수령의 사상으로 자신들을 무장하고 소년단원들을 교양하라.

혁명 교양을 강화하여 낡은 것을 뒤집어엎고 새 것을 창조하려는 데 선봉적 역할을 담당할 미래의 역군으로 준비하라.

원수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고 미국과 남한을 반대하여 끝까지 투쟁하도록 후손들을 교양하라.

나는 공산주의가 가르치는 대로 입에 거품을 물고 외쳐댔다. 그리고 2-3일에 한 번씩 분단위원장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사업을 총화하고 잘못에 대하여 비판하였으며 새로운 과업을 주문했다.

나의 이 열정적인 노력에 의해서 학교단 조직은 학교와 당이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이 활기차게 진행되어 갔다. 그런데 이러한 임무 성과 뒤에는 언제나 완력이 함께 뒤따랐다. 완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무기의 위력 때문에 내 수하의 학생들은 내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학생들이 다 우호적인 태도로 나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라 ‘따왕’이라는 내 주먹의 완력 때문에 할 수 없이 순종한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따왕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학교단위원장이라는 이 권력의 자리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1976년 6월 6일 그러니까 조선 소년단 창립일 때의 일이었다. 군사적으로 이날을 기념하여 체육대회를 조직하였다. 각 구, 리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경기에 참가하기 위하여 몰려왔다. 경기장은 수많은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서로 승부내기 경기를 응원하느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우리 학교와 다른 학교 간에 축구경기가 진행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응원대장으로 우리 학교 학생들의 응원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축구경기에 참가했던 우리 팀이 열세에 몰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다 못한 나는 나의 앞으로 지나치는 상대방 선수의 다리를 걸었다. 이로 인해 그 팀 선수들의 학교와 우리 학교 간에 싸움이 일어났는데 수적으로 우세했던 우리 학교 학생들이 그 팀 학교 학생들을 4명이나 중상을 입히는 사태가 초래되고 말았다. 결국 주모자로 지목된 나는 단위원장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패싸움을 일으키고 지도했다는 이유로 군사도청위원회로부터 요원추궁 끝에 학교단위원장 자리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학교단위원장의 박탈과 함께 나는 군대에 징집되어 갔다. 나는 14살에 군대에 징집된 것이다. 군에 징집된 나는 평양시 교외에 있는 어느 한 특수 훈련소에서 게릴라전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특수 훈련을 받았다. 후방교란에 필요한 전문적인 교육과 습격, 파괴, 납치, 범과, 유언비어 유포시키는 법, 심리전술 등 여러 가지 제2전선 활용에 필요한 교육을 몇 년간에 걸쳐 받은 후 정식조에 편입되었다.

내가 처음 조에 편입되었을 때의 나이는 19살이었다. 모두가 27살 이상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인간들이어선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느껴서인지는 모르나 첫인상이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속마음은 정말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시킬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조장, 소좌, 부조장 상위, 무전수, 기관총수, 포수 등의 역할과 그 직책의 군사활동을 그때 다 배우고 익혔다. 내가 군대생활 중 가장 중요하게 느낀 것은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헌신하려 하는 이들의 충성심이었다. 이들에게는 그 무엇도 아까운 것이 없었다. 청춘도, 미래도, 목숨도 이들의 사령관 요구라면 내놓을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자폭 정신, 총폭탄 정신, 이것이 이들이 외치는 구호였으며 실제로 이들은 그렇게 행동했었다. 그들은 말이 아닌 실제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훈련의 전 과정만 봐도 그렇고 모든 생활 영역에서도 이들 개개인의 마음은 오직 충성이라는 한 가지 생각으로 불타 있었다. 그 어느 순간에 폭음과 함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지뢰밭 돌파훈련이라든가 시시때때로 목숨을 위협하는 실전의 분위기 속에서도 이들은 생애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충성이라는 구호만을 외쳤다.

이런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단련시켜 나가던 나는 어떻게 하면 나도 저들의 정신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항상 나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육체적 고통이 가해지는 훈련은 나도 나의 잘 훈련된 체력 덕분에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수령을 받드는 전사의 충실성만은 도저히 이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정신력은 육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나의 정신력이 언제나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육체적 능력을 제한하였다. 고달픈 육체적 고통보다도 충실성을 키우는 훈련이야말로 나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부담으로 나는 항상 불만에 차 있었으며 모든 일을 악한 방법을 택하게 만들었다.

내 정신력을 높이고 체력을 키움에 있어서 그 바탕을 수령에 대한 충실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저 사람들보다 내가 못할 수가 없으니 저 사람들을 이겨야 한다. 내 자존심을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저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으리라.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이 시종일관 나의 생각과 생활을 지배했다. 이러다 보니 모든 일이 나에게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내키는 일은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내가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이것이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야 했으나 그렇게 생각하기는커녕 오직 저 사람들과 내가 다른 것이 무엇이랴. 같은 밥 먹고 왜 내가 저 사람들에게 뒤져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으니 모든 일이 항상 무거운 부담으로 다가왔다.

어쨌든 여러 차례의 군사행동과 실전교전을 통해서 나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르자 부조장이라는 자리까지 일약 승진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의 앞날은 창대해 보였다. 하지만 나의 가정환경(성분관계) 때문에 이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선배들은 군 생활을 마치고 요직에 배치되어 갔다. 이들을 보며 나는 저들처럼 출세의 창대한 길을 따라 줄달음치리라는 희망이 봄날의 새싹처럼 움텄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힘에 의지하는 군 생활이 신났다. 그러나 이 신나는 군 생활의 매 순간이 나를 운명의 시궁창에로 몰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의 고생이었다는 사실 앞에 섰을 때 운명의 상실감으로 해서 절망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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