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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요가 선생의 따뜻한 이야기 - 네 번째

[시애틀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4/25 09:26

좌충우돌 미국 정착기

아버지의 자식교육을 위한 ‘무작정 상경’이 한 번에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진행이 됐다. 내가 그 바통을 이어 아이들 교육을 위해 또 한 번의 ’무모한 유학’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아이들을 앉혀놓고 말하였다.
“어차피 가게 될 미국이니 너희들이 먼저 가서 영어도 배우고 문화도 익히면서 적응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할 수 있겠니?”

두 아이들은 좋다 나쁘다 얘기가 없다. 아마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공부하자니 끝없는 경쟁에 눌려 답답하고, 그렇다고 미국에 가라 하니 미국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겠고 하니 무슨 답을 할 수 있겠는가?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두 아이들은 부모의 간섭을 벗어나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움은 달콤한 유혹이긴 한데 그렇다고 말도 문화도 안 통하는 다른 곳에서 유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큰 두려움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결정이었지만 엄마의 권유와 회유로 두 아이들은 유학을 떠났고 고맙게도 그럭저럭 유학생활을 잘 견디어 나가주었다. 그러나 ‘그럭저럭’의 뒷모습에는 수없이 많은 눈물과 좌절, 절망, 외로움,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내가 미국에 짐을 풀고 정착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민이란 단순히 사전에서 정의하듯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민은 그동안 친숙했던 것과의 이별이고, 사는 장소만 바뀔 뿐 새롭게 다가오는 문제에 대한 해결능력이 필요하고, 자리잡을 때까지는 사회적 계층의 즉각적 하향이동이며, 자식세대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고자 하는 눈물의 희생이었다. 즉 이민이란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로,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어찌 보면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인 것이다.

미국에 왔다는 기쁨도 잠시 이 새로운 나라에 정착하려니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적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드니 잠시 관광이나 연수차 들렀던 길에 만났던 상냥하고 친절하던 미국인이 아니었다. 관광객으로 와서 돈을 쓸 때는 영어를 모르는 내게도 아주 친절하였지만, 그들과 부대끼며 돈을 벌려고 하니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것, 문화가 다르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약점과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영어수업에서 듣던 원어민 강사의 또박또박한 발음과는 달리 사람들의 말은 너무 빨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고, 길거리에 30분만 주차할 수 있다는 사인이 붙어 있는지 모르고 주차해서 딱지를 떼기도 했다. 집으로 날아오는 많은 요금 청구서와 문제해결을 위해 전화나 오피스를 찾아가는 것도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한 번은 비탈지고 구부러진 언덕길을 차를 운전하며 내려오는데 저 아래 오토바이 옆에서 가죽옷을 입고 짙은 선글라스를 낀 젊은 남자가 대낮에 나를 향해 총을 쏘려고 겨누고 있는 걸 보고 혼비백산했다. 나는 몸을 운전대로 낮게 낮추며 전속력으로 달렸는데, 갑자기 깜박거리는 불빛에 경찰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서야 백지장이 된 얼굴로 속도위반 티켓을 뗐던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대낮에 쇼핑몰 주차장에서 잘 잠긴 내 차의 유리창을 박살내고 차 안에 벗어놓은 신발까지 싹쓸이로 훔쳐 가 버렸을 때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커피숍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온몸의 에너지를 다 쓰고 있었고, 나 역시 모든 일처리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늘 긴장된 상태였다. 우선 영어와 생활비를 해결해야 했기에 대학교 ESL반에 등록을 하여 영어를 공부하며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주인은 한국인이었지만 손님들은 거의 흑인이 많은 뷰티서플라이였다. 늘 가게엔 손님들이 붐볐고 20개 정도의 카메라가 손님과 종업원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가게에서 8시간 이상을 거의 서서 있노라면 다리도 붓고 몸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또 가게엔 유리창이 없어서 일단 가게에 들어가면 바깥 날씨나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일이 바빠 해 뜰 때 일을 시작하면 해가 진 다음에 가게에서 나오는 일이 허다했고, 시애틀은 1년 중 반은 거의 비가 오는 곳이라 햇빛을 쪼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어느 날 몹시 피곤하여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해보니 비타민D가 부족하단다. 여기 사는 사람들이 비타민D3를 꼭 먹어야 하는 이유를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집에 오면 영어숙제하랴 집안일하랴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가게에 가면 흘러나오는 최신 팝송을 들으며 손님들에게 “저 가사가 무슨 뜻이야?”라고 물으며 영어로 대화를 나누려 애썼고 “네 옷이 예쁘다, 네 신발이 예쁘다”하며 어디서 샀는지를 묻고 들으며 쉬운 영어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삶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세계 다른 나라에 비하면 그래도 미국은 이민자들에게 열려있고 차별도 적었던 시기였지만(지금보다는 나았던 듯)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화에 미숙한 사람에게는 사회적 대우나 위치가 어떤 지 불 보듯 자명하였다. 이민초보자로서 아직 이민에서의 성공을 논할 단계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이민 오고자 했던 동기, 목표나 뜻을 이룬다면 이민의 일차적 성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고 결국은 경제적 안정과 ‘미국적 삶’, ‘미국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진정 성공적인 이민자의 삶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민이나 가 버릴까?”하고 쉽게 충동적으로(아마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또 그런 말을 하는 대부분은 정작 이민을 실행하지 않는다.) 온 이민이 아니었기에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내 위상에 불만을 갖기보다는 기초를 쌓는다는 심정으로 이겨나갔다. 한국에서 열정을 가지고 가르쳤던 ‘한국어 교육’에 대한 그리움이 많아 주말에는 한국학교에서 일하면서 여러 대학에 한국어 강사 자리를 알아보는 노력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나의 학력이 전무하였으므로 한국어 강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한 번은 라스베가스에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꼭 와달라는 뜻밖의 연락이 있었는데 좀 더 대화를 해보니 주로 기초단계만 수업이 개설되고 만약 학생들 신청수가 적을 때는 수업이 취소되기도 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 더운 환경에 일마저 불안정하다면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 취소가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한국인 여자 친구를 둔 미국 남자에게 한국어 개인지도도 하고 꾸준히 주말 한국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한국어 강사로서 내 전문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내가 한국어를 좀 더 전문적으로 가르치고자 한다면 다시 미국대학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임이 분명하였다.

그렇다!
미국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선 학교를 나와 자격증이나 졸업장, 혹은 학위를 따는 게 맞았다. 그러면 무슨 공부를 해서 돈도 벌며 인생을 즐겁게 살 것인가? 굳어버린 혀의 약점을 커버하고 사람들을 보살피고, 잘 들어주며, 친절한 내 성격에 맞는 일은 무엇일까? 다시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후 한국어 강사로서 길을 가야 할지 아님 다른 기술을 습득하여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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