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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④

[시애틀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4/25 09:37

(지난 호에 이어서)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건만
나는 드디어 13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귀향길에 올랐다. 13년 만에 처음으로 밟게 되는 고향, 얼마나 변했을까? 나는 몰라보게 변해 있을 고향땅에 도착해서 집을 찾는데 수고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차 안에서 별의별 궁리를 다 했다. 역에 내려서 집에 먼저 전화를 걸어 내가 도착했다는 것을 부모님께 알려야지. 그리고 기차역 앞 공원에서 부모님이 달려오는 것을 기다렸다 뜻 깊은 상봉을 한다. 얼마나 가슴 짜릿한 장면이겠는가?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시간이라는 관념 속에 잠시 포로가 되어 살아온 나의 군대생활의 습관적인 타성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집을 찾아 나서는 것보다 전화를 걸어 놓고 부모님들을 기다리는 것이 더욱 낫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무척 변모되었을 것이라 생각한 나의 고향 생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고향에 도착한 나의 눈앞에 펼쳐진 고향 전경은 변화는 고사하고 오히려 어두컴컴하고 음산하게 느껴져 왔다. 열차 안에서의 나의 생각은 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3년간에 걸친 기나긴 세월 속 고향은 변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더더욱 몰락한 듯했다. 내가 그토록 어렵게 찾을 것이라 예상했던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변모된 것은 세월의 연륜 속에 빼앗긴 내 부모님의 젊음뿐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너무도 늙어 보였다. 그렇게 젊으셨던 아버지도, 새색시 같던 어머니도 머리에 흰 서리가 내렸고 얼굴엔 주름이 가 있었다.

나의 부풀었던 가슴은 순간 실망으로 가득 찼다. 너무도 서글펐다. 고향에 도착한 나에게 서글픈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누이는 출가하고 없었는데 출가한 곳이 살아서는 올 수 없는 섬(군사기지)이라는 것이다. 현재까지 나는 매형이나 조카들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나의 운명의 배는 이렇게 돌아온 고향땅의 암울함을 싣고 사회라는 세파 속으로 닻을 올렸다. 기약할 수 없는 운명의 파도를 헤치고 어두운 풍파를 헤치며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내 운명의 배는 긴 고동 소리의 여운을 남기며 불운한 인생 기슭의 파고를 헤치며 떠나가고 있었다.

나의 출신성분 그리고 증조 할아버지의 부탁
나는 나의 증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함자를 모른다. 아버지께서 알려주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공산 제도하에서 제일 미워하는 일을 증조할아버지가 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증조 할아버지는 평양에서 목회를 하신 분이다. 갖은 입에 욕설과 함께 입에 침을 튀기며 공산사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의 정신력을
무력케 하고 타락시키는 일을 증조 할아버지께서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증조 할아버지에 대해서 묻는 나에게 항상 ‘너희 증조 할아버지는 사랑의 너울을 쓴 위선자였다’고 씁쓸해하셨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태도로 나는 증조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내가 증조 할아버지에 대해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명절날이나 기쁜 일이 생겨 아버지가 이따금씩 술을 거나하게 취하신 후 취중에 언뜻언뜻 들려주시던 옛말 같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아버지께서 증조 할아버지에 대해 가장 정확히 이야기해 주신 것은 어느 해인가 3.1봉기(3.1만세운동) 기념행사 소식이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서 보도된 후였다. 그때 아버지는 3.1봉기를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관하여 진행했는데 나의 증조 할아버지도 그 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하셨다. 3.1봉기 여파로 일본인들의 탄압 대상이 된 기독교 지도자들은 수십 명이 잡혀 가서 참형을 당했는데 증조 할아버지도 그때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됐다고 한다.

진취성이 강한 증조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봉건제도를 반대하고 새로운 선진사상을 갈망하신 현대인에 가까운 분이셨다고 한다. 그래서 증조 할아버지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쓰신 분이었다고 한다.

증조 할아버지 당시 우리나라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여러 명의 미국 선교사들이 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증조 할아버지는 초대 미국 선교사들과 합심하여 평양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셨다고 한다. 구체적인 내막은 모르겠으나 증조 할아버지는 평양의 숭실학교라는 곳에서 목회자들을 배출해 내셨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증조 할아버지가 중요한 위치에서 활약하신 것으로 짐작된다.

증조 할아버지는 진취성이 강하고 남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풍부하신 분이셨다고 한다. 아버지에 의하면 동네 어른들은 모든 일을 증조 할아버지에게 의논했으며 의술도 있어서 동네의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증조 할아버지는 세상 천하에 하나님 한 분 밖에 천하를 다스리는 지배자가 없다고 입버릇처럼 외우시곤 했으며 우리 할아버지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증조 할아버지는 일상생활과 차림새에 이르기까지 봉건적 관습적으로 따르지 않고 기독교식으로 하셨다고 한다. 기독교 사상에 언제나 반기를 드셨던 아버지는 그 때 일을 회상하면서 정말로 답답해하셨다. 할아버지의 요구를 따르자니 세상적인 일을 할 수가 없고, 따르지 않자니 할아버지의 요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증조 할아버지가 우리 가정에 하나님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면 할아버지는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봉자였다고 한다. 증조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후 대를 이어 할아버지가 온 동네를 기독교 사상으로 무장하려 하였다고 한다.

증조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시면서 할아버지에게 우리 가정은 주님의 가정이니 모든 인륜대사를 모두 주님의 주관 하에 진행해야 한다고 간곡히 부탁하고 천국에 가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증조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우리 가정이 철저히 주님의 의도대로 살기를 원했고 가정의 모든 질서를 주 안에서 풀어 나갔다고 한다. 나의 큰 아버지(김봉현)가 목회를 하게 된 것도 할아버지의 강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원래 큰 아버지는 체육을 즐겨하였고 할아버지가 요구하는 목회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성경을 공부하라고 하는 할아버지의 요구를 별로 탐탁해하지 않아 할아버지의 요구에 늘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활동적이며 혈통이 진취성 강한 가정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큰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요구와는 상반되게 그 무슨 데모에 자꾸 참가하여 어릴 때부터 운동에 휘말려 들곤 했다고 한다.

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평양 일대에 독립운동이 활발해졌었는데 큰 아버지는 목회를 하라는 할아버지의 요구는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무슨 독립운동을 한다고 떠돌아다니곤 했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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