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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럭커의 사는 이야기

열한 번째 - 안정권에 들어선 미국 생활

군대에서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란 소리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막에 내놔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소리를 가끔 들었다. 그런 나였지만 미국 이민을 와 초기에는 향수병으로 상당히 힘들었다. 집사람과 늘 싸웠던 원인 중 하나가 ‘미국에 못 살겠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하는 소리였다.

나중에 집사람도 포기하고 짐을 싸 주면서 ‘돌아가라’고 했다. 막상 돌아가려니 한국 가서 생활하는 것도 막연했다. 이민 초창기엔 일 년에 한 번씩 매년 한국을 나갔다. 처음 나가니 예전에 나를 따르던 지인들이나 친구도 많이 모였다. 친구가 물었다. “미국서 뭐하냐?” 참 난감한 질문이다. 아직 한국 때를 못 벗은 시기라 차마 트럭 한다는 소리는 못하고 “엉, 트럭 사업해.” 트럭 일과 트럭 사업의 차이가 뭔지는 몰라도 그 표현 하나에 듣는 사람의 편견이 달라진다.

그러면 “와~ 대단하다. 트럭이 몇 대인데… 그 트럭은 비싸다 하는데 사업은 잘 되냐?”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한국 사람의 본성이 막 나온다. 얼버무려 “지금은 시작 초기라 한 대로 시작하는데 곧 나아질 거야…” 하지만 일 년, 이년이 지나도 한 대뿐이다! 아니 늘릴 생각도 없다. 그러다 보니 해가 지날수록 친구 만남도 적어지고 이젠 한국 나가도 부를 친구가 몇 안 된다.

미국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면서 행여 ‘야, 고작 트럭 운전하려고 미국 갔냐’ 하는 소리 듣기 싫어서... 시골에 계신 친척을 만나러 가니 첫마디가 “애야, 미국 가면 그렇게 고생한다며… 너는 어떠냐? 사는데 어렵지 않냐?”, “우리 옆에 사는 사람은 이민 가서 20년이 되어도 못 나오는데 넌 매년 한국에 나오는 거 보니 돈이 많은가 보구나.” 하는 말씀이었다.



예전에 촌에 가면 서울에 안 걸린 친척이 없었는데 이젠 촌에도 외국에 관련 안 된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을 땐 미국서 왔다 하면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 얼마나 풍요로운 생활을 할까 하는 생각으로 영화 속 파티나 보트 타고 유유자적 노는 장면을 연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국이 잘 사는 이유도 있지만 미국 가면 막말로 하루하루 일터에서 고생고생 한다는 것을 이젠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돈이 있어도 대개의 사람들은 비즈니스 문 닫고 감히 며칠씩 어디를 갈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모두가 하루살이 인생처럼 바뀌어 버린 것이다. 내가 이민 와 보니 차라리 고생하더라도 일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남자들이 더 그랬다.

나도 스스로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주위의 도움이 있어야 빛을 발할 수 있지 도움이 없으니 헛고생만 하고 남 좋은 일만 시켰던 것이다. 다행히 큰애 남친이 디스패쳐(DISPATCHER) 일을 해주니 바로 효과가 나왔다. 미국 큰 브로커 회사는 일을 잡아 물건을 실으면 50% 선금을 주고 배달을 끝내고 나면 이틀 이내 통장으로 바로 나머지 입금이 되었다. 이렇게 빠른 시스템에 투명한데 LA에 디스패쳐들은 돈 입금 안 되었다고 거짓말로 늦게 주고 로드 가격 속여 떼어먹고 그리고 처음 로드 2707.50 달러도 미국 브로커가 준 돈에서 속이고 떼어 가려니 소수점이 나왔던 거였다.

또한 딜(Deal)을 하여 그들이 제시하는 금액보다 배달비를 더 받을 수 있고 수입도 투명하니 버는 액수도 더 많았다. 긴 시간 필요없이 바로 생활이 달라지는 것이 피부로 다가왔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서서히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도 적어지고 주위에서 5년만 기다려 봐라 그러면 달라질 것이다 했는데 정말 5년이 지나니 한국이 조금씩 낯설기 시작했다.

외롭고 힘들긴 했어도 장거리 트럭을 했기에 미국의 새로운 세계를 느끼면서 견디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한 도움을 주겠다고 여러 사람을 트럭에 태우고 함께 하면서 외로움도 달래고 그들에게 많은 마음의 위로를 받아 이겨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불편한 좁은 공간에서 나의 별난 성격을 잘 견디어 주며 함께 했던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때 미국 사람들은 정직하고 친절하고 검소하다고 했는데 그것도 반은 사실, 반은 우리의 잘못된 교육이기도 하다.

예전에 미제는 무엇도 좋다고 했던가? 장거리 트럭을 하면서 플레이트 넘버가 다른 주로 되어 있으면 트럭 정비소에 가면 엄청난 바가지를 씌우는 게 미국이다. 너가 여기서 안 고치면 어찌하랴 하는 심보로 마구 가격을 높인다. 장거리 트럭은 고치고 가면 하자 발생이나 반품이 힘들어 ‘막보기(얕보아 마구 대함. 얕보기-편집자주)’ 손님인 것이다. 솔직? 한국 사람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숱하게 경험한 나로서는... 그래서 트럭 고칠 일이 있으면 되도록 집에 와 고치려고 애쓴다. 그날도 집에 돌아와 동네 정비소를 갔는데 한국 사람 몇 명이 그 정비소에 있었다. 인사하고 이야기하다 보니 그들은 나 보고 “왜 집 떠나 고생을 하느냐, 로컬도 장거리 못지않게 돈을 버는데 로컬을 하라.” 조언을 한다.

생소한 일이라 변화가 두려워 망설이다 한인 트럭커 모임에 참석을 하고 나서 마음으로 결정했다. 시애틀 근처에 한인 트럭커들이 10여 명 있다는 것도 알았다. 로컬로 전환하는데 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장거리 트럭 6년 만에 드디어 막을 내리고 로컬로 전환한 것이다. 로컬 일도 준비할 것이 많았다.

항구를 들어가려면 FBI 신원조회도 거쳐야 하고 터미널 상태도 알아야 하고, 한동안 힘들었다. 일을 시작하니 놀라운 것은 터미널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몇 명을 빼고는 너무도 불친절했다. 터미널 안에 들어가면 어떤 터미널은 수용소 죄인들 취급하듯이 하는 거였다. 불같은 성격인 나로서는 참을 수 없어 못하는 영어로 싸우고 따지다 보면 한국말로 욕이 막 나온다. 그 싸운 댓가로 3일을 그 터미널에 못 들어오게 한다. 어이가 없다. 그렇게 쫓겨난 것이 몇 번 된다.

거기다 일 년에 세 번 쫓겨나면 3개월을 못 들어간다. 하루 벌어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트럭 드라이버에겐 치명적이다. 파블로프의 원리라 했나, 조건반사에 의해 개에게 밥을 줄 때 종을 치면서 주면 시간이 지나 밥을 안 주어도 종을 치면 침을 흘린다고. 어느새 시간이 지나니 나도 그곳에 길들여진 순한 양이 되어 버렸다.

이게 우리가 사는 현실인 것이다. 트럭을 선택했으니 솔직히 이 일 그만두면 갈 곳도 없다. 싫든 좋든 가장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던 어느 날, 둘째가 얼굴이 상기돼 집에 왔다. COLLAGE에서 워싱턴대학(UW)으로 트랜스퍼 했는데 합격되었다는 거였다. 남친이 밤늦도록 남아 무얼 가르치고 무언가 하는가 했더니 대학 트랜스퍼를 준비하고 시험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견했다. 공부하며 두 군데 아르바이트에...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 와 COLLAGE에 다니는 큰애가 “아빠, 나도 UW에 합격했어.” 한다.

힘든만큼 보람이 나타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학교를 안 간다. 거짓말을 한 줄 알았는데… 미국은 참 이상한 나라다. 큰애가 미국에 온 지 2년이 안 되어 합격은 했지만, 2년 거주 크레딧을 쌓아야 학교를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애는 UW에 합격을 하고 COLLAGE에 다니면서 어학공부를 했다.

6개월이 지나 미국 거주 2년이 되었다고 말하더니 학교를 다녔다. 한국에서 대학 3년 다닌 경력과 멕시코 학교 점수를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학점이 있어 쉽게 UW에 입학할 수 있었지 않았나 한다. 그런 기쁨이 있어 영어 못한다고 터미널에서 무시당하고 새벽에 일터로 나가기 싫어도 눈 비비고 힘차게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미국 생활이 각박하고 개인주의이다 보니 이웃과 멀어지고 마음이 닫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린 마음속 깊이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어찌 보면 서로 싸우고 헐뜯는 것처럼 보여도 힘들고 어려울 땐 모두가 나선다.

그것이 자랑스럽다. 비록 미국을 모르고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그것이 밑거름 되어 오늘에 이르지 않았나 한다. 이젠 나도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다가온 것 같다. 13년 이민생활의 이야기를 어찌 몇 번의 지면으로 다 이야기할 수 있겠냐마는 하고 싶은 이야기와 에피소드는 다음 회로 마치기로 하겠다.

특정 지역을 이야기하고 특정 사람을 이야기한 것은 나의 개인적 견해이고 이민생활에서 부딪힌 것이 그것이었기에 이야기 한 것임을 밝히고 싶다. 부탁하건대 이민생활에서 내 일만 열심히 해도 그냥 힘들다. 그런데 멀리 집 떠나 고생하는 드라이버에게 일 한 거만이라도 제대로 찾아주었으면 한다. 좋은 사람도 많겠지만 몇몇 사람 때문에 모두가 안 좋은 인식을 받을 수 있다. 살아보니 가장 힘들 때 조금의 도움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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