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미국 요가 선생의 따뜻한 이야기

첫 번째, 고등학교 화학교사가 되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엄마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골 이곳 저곳으로 전근을 다니며 근무하고 계셨고, 우리 형제 자매 네 명은 지방 소도시에서 엄마와 함께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내 기억에 우리 집이 한 번도 부자, 아니 먹고 살 만하다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 걸 보면 항상 가난했던 거 같다. 어린 나이에도 학교에서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한 거라든가, 용돈을 달라든가 하는 말들을 부모님에게 하는 게 매우 어렵게 느껴졌었던 기억으로 딱히 가난이란 말을 입에 담은 적은 없지만 늘 ‘어려운 가정환경’의 학생이었다.

그 당시 새 학년으로 올라가면 선생님이 가정환경을 조사한다면서 “피아노 있는 사람?” “전화 있는 사람?” “텔레비전 있는 사람?” “자전거 있는 사람?” 등등을 묻곤 했는데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가지 항목에도 손을 든 적이 없었다.

내가 중학교에 올라가자 시골학교에서 잘 계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표를 내겠다고 선언을 하셨다. 가정주부인 엄마와 초등학교부터 중,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있는 네 명의 자녀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의 갑작스런 사표 소식은 우리 가족의 큰 충격이다 못해 엄마는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엄마와 상의없이 내린 아버지의 중대 결정이 너무 무모하다면 무모하고 그야말로 무 대책, 무계획적 결단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사표를 내겠다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 네 명을 서울에서 SKY 대학을 보내려면 지금 서울로 가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이었고 지금이 아니면 우리 네 명은 지방대를 나올 수밖에 없다는 이상한 지론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울로 대학을 가면 아버지 월급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대줄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어려움이 있지만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면서 단호한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어디에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늘 귀가 얇아 다른 사람 말에 흔들리고 키 작고 왜소한 체격의 아버지가 그때는 동화책에 나오는 거인처럼 느껴졌었다. 그런 아버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엄마는 우리 네 명을 앉혀놓고 말했다.
“나는 네 아버지를 따라 갈 수 없으니 네들만 아버지를 따라 가거라.”

우리 네 명은 이혼이 될 거 같은 이 불안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만 흘리는데 며칠동안 엄청나게 큰소리가 나며 우당탕탕 싸우더니 서울 갈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무작정 상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가족 모두가 갑작스레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따라서 학교도 전학이 이루어졌다. 그때까지 한 번도 서울에 와 본적이 없었던 나는 서울의 높은 빌딩들과 서울 말씨를 쓰는 예쁜 여학생들 사이에서 완전 주눅이 들었지만 답십리 방 두 칸의 작은 전세집에 살면서도 우리 네 명의 형제 자매들은 아버지의 ‘자식들 서울 SKY대 보내기 작전 프로젝트’의 꿈을 SKKE로 이루어주었고, 그동안 여러 잡일을 하던 아버지는 운 좋게도 서울에서 다시 복직할 기회를 얻어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마침내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물리, 생물, 지구과학, 화학 중 그래도 화학 점수가 제일 잘 나와 나는 화학을 잘하는 줄 알고 대학에서 화학과를 선택했는데, 그것은 내 인생의 첫 번째 큰 실수였음을 머지않아 곧 깨닫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책과 문제집을 달달 외워서 단기적인 지식을 묻는 시험에서는 좋은 성적을 얻었지만 막상 대학에서 수학과 화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원자, 분자들의 화학 결합, 실험을 통한 결과 도출을 찾아내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을 때 아차! 내가 화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때는 이미 늦었다. 도저히 이 길로 갈 수 없을 거 같아 전과를 할 수 있을까, 아님 대학 시험을 다시 봐야 할까 진짜 고민을 많이 하였지만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발을 내딛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에, 다시 재수를 시작할 만한 가정환경도 아니고, 게다가 그 당시에는 전과(Transfer)라는 제도 자체가 없어서 체념한 채 방황하던 중 동아리 활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는 전두환 대통령 군사 집권시절로 과외가 전면 금지되고 혁신적인 입시제도의 개편이 이뤄진 시기였다. 나는 대학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는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였는데, 우리는 매우 거친 가정사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을 사회제도, 정치사와 연결시키면서 민주화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 멤버 중의 여자 한 명이 매우 터프하여 담배도 피우고 술도 잘 마셔서 머리는 똑똑한데 가정사에 어려움이 있나? 하고 혼자 생각하곤 했는데 어느 날 자기 집에 같이 가자고 초대를 하여 같이 가게 되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그렇게 부잣집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친구의 큰 오빠는 서울대를 나와서 의사를 하고 있었고, 둘째 오빠 역시 서울대를 다니고 있었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는 어머니는 방금 미장원에서 나온 것처럼 아름답게 치장이 되어 연예인 같았고, 사업을 하신다는 아버지는 사진에서 밝게 웃고 계셨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란 아이가 허름한 옷에 그 당시 흔치 않았던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담배 피우기, 막걸리, 동동주, 소주 할 것 없이 사발로 마셔대기를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거침없이 하고 소신껏 인생을 즐기는 그 친구가 마냥 부럽기도 했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풍족한 환경에서 늘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주저 없이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밀어준 그녀의 가정환경과 교육영향 때문일 거라고 나름 해석하였다. 그녀는 사회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파고 들었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질문을 쏟아내며 답을 찾기 위해 노동현장, 농촌활동의 거칠고 힘든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했는데, 그 집을 방문한 뒤로 나는 그 친구와 매우 다른 가정환경, 교육배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4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자 동아리 친구들도 직업을 찾아 한 명 두 명 떠나기 시작했고, 어느 날 그녀의 친척 된다는 집에서 과학 과외교사를 구한다면서 나더러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였다. 과외 금지령이 내려 과외 하다가 걸리면 퇴학을 당하는 삼엄한 분위기에서 영어, 수학, 과학 과외를 하고 있다는 부잣집 중학생 아이의 이야기였다. 안전에 대해서는 학생의 부모가 책임질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면서 위험수당을 포함하여 돈도 두둑이 준다 하였다.

한강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동부 이촌동 학생 집을 방문하여 인사를 하고 그날부터 과학 과외를 시작하였다.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운전기사가 학교 앞에서 날 기다려 집까지 태워다 주었고 수업이 끝나면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다 주었다. 이렇게 몇 달을 수업하고 있는 중 우연히 학생 방의 책꽂이에서 어느 고등학교의 교지를 보게 되어 들춰보고 있자 학생이 하는 말이 자기네 학교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집 할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 정권 때 옷감에 물감 들이는 큰 사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어서 서소문과 을지로에 큰 빌딩들을 샀는데 세금을 면제받기 위해 육영사업에 돈을 투자하여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국에 모두 세 개의 학교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고등학교가 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마침 졸업시기도 다가오는데 어느 날 학생의 엄마가 나더러 아직 직장이 결정나지 않았으면 나처럼 성실하고 유능한 선생이 필요하다면서 이 학교에 가서 일해 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 직업이 고등학교 화학교사가 되었다.

2월 25일 졸업을 하고 3월 2일 이 학교에 부임을 했는데 막상 이 학교에 가 보니 화학 수업이 12시간밖에 필요하지 않아 같은 캠퍼스에 있는 중학교에서 국어를 12시간 가르치라고 하였다. 지금이야 절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겠지만 그 당시에는 한 선생이 두 개 과목을 가르치는 일들이 더러 있었다. 갑작스레 국어를 가르치라 하니 참 난감하였다. 방금 발령을 받아왔는데 당장 그만 둘 수도 없고 하여 매일매일 국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국어를 가르치면서 나는 알았다. 시를 공부하고 소설을 공부하고 국어 문법을 공부하는 시간들이 절대 지루하지 않음을… 내가 진짜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그때 국어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나중에 고등학교를 그만둔 후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때 시간을 내서 읽은 많은 책들이 나중에 미국에 와서 요가책을 쓰는데 큰 밑거름이 되어주기도 했다.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