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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사는 이야기] 미국 요가 선생의 따뜻한 이야기

세 번째, 요가를 시작하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가슴 뛰는 일, 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책에서, 학교에서, 미디어에서 무언의 압력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러나 나에게 딱 맞는 일이 무엇인지, 나를 흥분하게 하고 성장시키며 마침내 남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일이 뭔지, 지치지 않고 밤을 새게 하는 일이 뭔지를 결코 찾지 못한 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살다가 때로 힘들 때면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니냐며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고등학교 교사라는 안정된 직장에서 적당히 살겠다는 타협을 거부하고 가슴 뛰는 일을 찾아 전혀 새로운 분야인 한국어학과 대학원에 도전하였고,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일은 즐거웠다.(우리가 자국민을 가르칠 때는 ‘국어’라 하고 외국인들에게 가르칠 때는 ‘한국어’라고 말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공부가 재미있다는 것을 느끼고 신기하였다.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해,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해 억지로 책상에 앉아 책을 보던 그런 공부가 아니라 내가 진정 원하고 좋아하며 성장하는 공부를 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고 레포트를 작성하고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하고 학회발표를 하며 논문을 써 나갔다. 그때 당시엔 대학생들의 해외연수나 휴학이 좀처럼 없던 시절이었기에 다른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진학한 20대 초반인 것에 비해 나는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공부가 재미있어선지 성적은 언제나 탑이었다. 영화를 즐겨보던 나는 ‘영화를 활용한 한국 문화수업 방안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제출하고 대학원을 졸업한 후 바로 같은 대학의 한국어 어학당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언어는 단순히 커뮤니케이션의 수단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사회문화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한국어를 외국인들에게 가르치면서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 나 스스로 많이 공부하였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려 많이 노력하였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매우 즐거웠으나 권위적이고 편협하며 통제력 강한 젊은 원장님이 새로 부임하면서 직장생활이 이상하게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책임을 서로 회피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직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친하게 지내던 관계들이 소원해지고 불협화음이 계속 발생하였다. 그런 와중에 맘 터놓고 지내던 동료 강사들이 직장을 떠나고 낯선 사람들로 그 자리가 메꿔지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자 나는 아프기 시작하였다. 머리도 아프고 어깨도, 허리도, 눈도 발도 다 아팠다. 날마다 일어나면 온몸이 천근만근이라 내가 몸의 주인인지 몸이 나를 끌고 가는 건지 모를 정도의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병원을 쇼핑하기 시작하였다. 모두 신경성이란다. 내가 유독 예민해서 그런 거란다.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집 근처 요가원이 새로 문을 여는지 매일 신문에 전단지가 끼어 들어왔다. 요가원 광고지에는 큰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요가를 해야 할 사람
(1)생각이 많고 걱정이 많아 현재에 살지 못하는 사람


(2)비틀린 자세와 구부정한 자세로 소화기능이 약한 사람
(3)밸런스가 약하고 집중력이 약한 사람
(4)몸이 유연하지 못해 혈액순환 장애가 있는 사람
(5)스트레스로 인해 사고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다 해당되었다. 다음 날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요가원을 찾아갔다. “어쩌면 서구의학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을 요가가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서 말이다. 아주 젊고 건강해 보이는 남녀가 원장이라면서 나를 반겼다. 두 사람은 남매였는데 오빠는 전자공학을 전공해서 기업체에서 근무하다 요가를 알게 된 후 푹 빠져서는 마침내 요가 선생이 되어 현재 대체의학과 박사과정에 있었고, 동생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여 학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다 오빠가 요가 하는 걸 보고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부터 요가를 시작하였다. 날마다 퇴근하면 요가원에서 수련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하던 몸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드러워지면서 몸의 균형이 찾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서서히 천근만근 짓누르던 어깨 통증이 사라지고 골반이 열리면서 다리가 부드러워지고 몸이 가벼워지자 마음도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나를 가르치던 젊은 남자 요가 선생은 요가를 하는 중에 ”편식, 편애가 좋지 않은 것처럼 편동은 우리 신체의 균형감각을 무너뜨린다. 요가는 이 편동을 바로잡아 균형을 되찾아주는 운동이며 호흡이 여러분의 동작을 도와줄 것”이라고 언제나 강조하였다.

몸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매달렸고 수련하였다. 점점 수련시간이 늘어나 매일 하루에 2-3시간씩을 요가원에서 보냈다. 처음엔 단순히 건강해지고자 하는 목적으로 수련을 시작하였으나 늘 바쁜 마음을 잠재우고 느리게 진행되는 요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하였다. 점점 동작이 깊어지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보람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러나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스트레칭 하고, 근육 톤을 좋고 단단하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자세를 비틀고 늘리고 힘을 주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것은 편안하고 익숙한 곳에 머무르려 하는 게으르고 편협한 내 몸에 도전장을 내미는 일이었으며 겁 많고 소심하여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는 내 마음에게는 경고장을 보내는 일이었다. 계속되는 수련으로 내 몸에서 느껴지는 한계를 조금씩 넘어서는 한편 고정되고 닫힌 마음의 경계도 함께 무너지고 넓어짐을 느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 마음과 몸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알아차렸고 나아지기 위한 고통(Improvement Pain)을 즐겼다.

처음에 다리를 양 옆으로 벌리고 앞으로 구부리는 우파비스타 코나사나(Upavistha Konasana, Wide-angle Seated Forward Bend)를 할 때 무릎까지밖에 가지 못했던 두 손이 어느 순간 발목까지 가면서 가슴이 바닥에 닿았을 때는 경이로움까지 느껴졌다. 덥고 습한 여름날에도, 춥고 바람 부는 날에도 요가를 하는 것에 내 몸은 감사했고,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내보낼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호흡을 조절함으로써 충동적인 욕구와 불필요한 감정소비가 자제되고, 내 몸을 사랑함으로써 몸이 싫어하는 음식이나 무절제한 시간관리로부터도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삶의 방식이 바뀌기 시작하고 나는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님이 요가 자격증 반이 개설되니 이번 기회에 자격증을 따 보라고 권하였다. 꼭 요가 선생이 안 되더라도 인생은 알 수 없으니 백업 플랜(Backup Plan)으로라도 해보라며 말이다. 그래 자격증 하나 따 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3개월 동안 주말마다 이론강의를 듣고 포즈공부도 하여 마침내 강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강사 자격증을 얻게 된 주말에는 같이 공부했던 동료학생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해남으로 1박 2일 수련회를 가서 명상도 하고 요가수련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수련회에 초대된 교수님의 지도로 ‘자신에게 쓰는 편지’라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약점과 강점, 각오 등을 써서 발표하는 시간이었는데 많은 학생들이 상처받아 아픈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며 울기도 하고 앞으로의 계획과 각오를 발표했다. 내 차례가 돌아오자 요가가 내 생각과 생활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니 나도 누군가에게 나와 같이 변화된 즐거운 경험을 주고 싶고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요가를 가르친다면 어떨까? 글쎄, 못할 것도 없지 않겠어?” 요가를 가르치는 멋진 모습이 상상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큰 소리로 말하였다. “예전에 나는 명예를 얻고, 좀 더 집중 받고 싶었으며, 인기를 얻고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게 꿈이었다. 그렇게 되지 못하는 나를 늘 책망했고 내가 언제나 부족하고 못마땅하였다. 요가를 처음 시작할 때는 선생님의 맘에 드는 포즈를 만들기 위해 고통을 참으며 땀을 흘렸고, 남들과 비교하며 그들보다 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강사 과정에서 배운 요가철학과 깊이 있는 수련을 통해 나 자신의 내면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고, 좀 더 성숙해진 나를 보게 되었다. 나는 미국에 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 가면 내가 변화되고 성장했듯이 변화를 꿈꾸는 어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삶의 의미를 나누는 멋진 한국인 요가 강사가 되고 싶다.”

선생님과 동료들이 박수를 쳐 줬다. 그러나 그때 내 말을 진정으로 믿었던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그 교수님은 자기가 말한 각오를 종이에 써서 편지봉투에 넣어 잘 보관하고 있다가 가끔씩 꺼내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이 오십에 나는 까맣게 잊고 지내던 미국 이민통지를 받고 이민가방 속에 그 편지봉투를 넣어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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