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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에세이] 미국의 대표 시인, 월트 휘트먼 (2)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샌프란시스코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8/04/10 09:38

1861년에 시작된 남북전쟁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당시 그는 41세로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돌보고 있었는데 전쟁에 북군으로 출동한 동생이 버지니아에서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동생은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시인은 전장의 참혹한 현실을 목도한 후에 그저 후방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41세로 징집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원하여 그 지역은 야전병원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매일 방문하면서 다친 병사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로 근무했다. 그동안 받은 원고료라든가 봉급 등은 모두 병원에 기부해 의약품과 의료기기 마련에 도움을 주었다.
전쟁의 경험은 그의 시 작풍에 큰 영향과 변화를 주었다. 1873년 초 그는 경미한 뇌졸중을 겪었다. 그해 5월 일생 아주 가까웠던 어머니가 별세했는데 휘트먼은 깊은 우울증과 고립감에 빠져 들어갔다. ‘기력이 없어지고 깊은 고립감에 쌓인 휘트먼은 일생을 통해 가장 깊은 우울증에 빠졌었다.’ 당시의 심정을 그는 ‘콜럼버스의 기도’란 시에 표현하고 있다.
남북전쟁과 어머니 죽음에 대한 애도의 극복으로 그는 결단력이 생겼으며 그로 인해 그의 시풍은 훨씬 활달하고 자유스러워졌다.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하나의 지방시인으로부터 미국의 문단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세계적인 시인으로 변화한 것이다.
휘트먼은 남북전쟁을 장년기에 맞았다. 그래서 그는 노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연방을 탈퇴하자는 남부 주들의 의견이나 이를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막고 미합중국을 유지하려는 링컨 대통령의 주장도 들었다. 그는 북부출신답게 연방제를 유지하려는 링컨 대통령의 주장을 적극 지지했다. 남북전쟁 당시에도 그는 후방에서 침묵하는 대신 몸소 자원자로 지원하여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야전병원을 방문했다. 그는 미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과 동시대 사람이었지만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대통령의 박애주의와 평등주의를 옹호하면서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인간을 팔고 사는 것은 악이다. 이것은 미국 이상주의에 정면으로 반한다. 부자는 더 돈을 벌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는 사회분열을 초래한다. 노예제도가 폐지되어야 미국은 인간 정신의 해방자로 세계의 희망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1861년 전쟁이 끝나면서 링컨 대통령은 암살되었다. 즉시 휘트먼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시인 ‘아. 선장님! 우리 선장님!(O Captain! My Captain)’을 발표했다. 그 내용이 아주 장중하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이 시는 조금 길기는 해도 미 국민들이 즐겨 읊는 애송시가 되었다.
“오, 선장! 나의 선장님이시어!/ 두려웠던 우리들의 항해는 끝났습니다.
우리 배는 온갖 고초를 겪어냈고 우리가 원하던 결과를 이루었습니다.
항구는 이제 가까웠고. 종소리가 요란히 울리며, 환호성이 들립니다.
꾸준히 달리는 뱃머리로 고개를 돌리자, 배는 단호하고 담대하게 달립니다.
그러나 내 심장! 심장! 심장!
피로 물든 갑판에는/ 내 선장님이 누워 계십니다.
차가운 시체로 변해. (하략)
1873년 가벼운 뇌졸중을 겪은 그는 뉴저지에 칩거하면서도 계속 시작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1888년 두 번째 뇌졸중을 겪으면서 활동을 접어야 했고 1892년에 사망했다.
그의 시는 유럽 각지의 문인들만이 아니라 20세기 초 영국의 작곡가들의 주목까지 끌었다. 구스타브 홀스트나 프레드릭 델리우스는 자신들의 작품에 휘트먼을 언급했다. 특히 랠프 본 윌리엄스는 이 시인에 대한 애착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그의 교향곡 1번 (바다 교향곡)이나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Donna Nobis Pacem, 보통 미사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휘트먼의 시를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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