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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칼럼] 버팀목

여우비 스치고 지나간 오후, 뒤뜰에 나와 숲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잔디 위로 내리는 투명한 햇살에 마음마저 싱그러워지는 느낌이다. 온통 초록빛인 숲속 나무들 사이에 주홍빛 능소화가 피어있다. 소나무에 넝쿨을 감고 오른 능소화는 꽃 빛깔이 어찌나 뚜렷한지 멀리서 보면 마치 소나무에 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

처음 이사 왔던 해 겨울, 뒷마당을 살펴보다가 숲속으로 가는 길 입구에 넝쿨에 칭칭 감긴 소나무 한그루를 보았다. 배배 꼬인 넝쿨의 말라빠진 모양새도 볼품이 없었지만, 그보다는 둥치부터 시작해서 줄기 끝까지 넝쿨에 죄인 듯한 소나무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다. 날씨가 풀리면 넝쿨 밑동을 쳐서 없애야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을 잊었다가 이듬해 한여름이 되어 꽃이 핀 것을 보고서야 그것이 능소화라는 것을 알았다.

능소화는 색소폰의 벨처럼 생긴 큰 꽃송이와 주홍빛 꽃 빛깔이 하도 강렬해서 한번 보고 나면 잊히지 않는 꽃이다. 하늘을 능히 이길 만큼 아름다운 꽃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능소화지만,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버팀목이 없이는 저 혼자서 설 수 없는 넝쿨 식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땅을 기어가던 능소화는 하늘을 향해 높이 자라는 소나무가 부러워서 자기도 먼 곳을 볼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 했다고 한다. 능소화의 아름다움에 반한 소나무가 쾌히 승낙하여 능소화가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버팀목이 된 소나무를 바라보다가 내 인생의 버팀목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사는 동안 우리는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다. 그 사람 중에는 그 존재만으로도 내 삶을 든든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이 있다. 문득, 지인 한 분이 떠오른다. 서로 띠동갑의 나이 차가 있으니 친구라기보다는 내 삶의 지표로 삼은 인생 선배다. 세상의 어떤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제 일을 해내고, 남에게 봉사하며 사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는 분이다. 가끔 사는 게 퍽퍽해서 목이 멜 때, 내 삶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게 해주는 분이니 내게는 버팀목이 되는 분이다.



성공한 삶을 이루려면 반드시 중요한 세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첫째는 형제자매처럼 가까운 친구고, 두 번째는 인생의 방향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선배 그리고 셋째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무조건 믿고 따라오는 후배라고 한다. 내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내 목소리나 얼굴빛만으로도 내 마음을 알아맞히는 동기간 같은 친구가 있고, 소리 없이 뒤에서 나를 지지해주는 버팀목 선배도 있다. 그뿐인가. 내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라오는 후배도 있으니 내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숲속에 핀 능소화의 고운 빛을 바라보다가 그만 생각이 곁길로 빠졌다. 오늘 저녁에는 한동안 찾아뵙지 못한 선배에게 안부 전화를 넣어야겠다. 내일 점심때에는 먹고사는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기를 미루었던 친구를 불러 시원한 냉면이라도 같이 먹어야겠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버팀목 같은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생각해 볼수록 고마운 일이다. 세상의 어떤 이들은 참으로 늘 한결같다.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의도 없이 그저 능소화의 버팀목이 되어준 소나무처럼 내게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들.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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